정식 명칭은 파키스탄이슬람공화국(Islamic Republic of Pakistan)으로, 인도 서북방에 위치하며 해안선의 길이는 1,046㎞이다. 면적은 79만 6,095㎢, 인구는 1억 9908만 5847명(2015년 현재), 수도는 이슬라마바드(Islamabad)이다.
종족구성 펀잡인 66%, 신드인 13% 등이다. 언어는 공용어 우르두어 외에 영어가 널리 통용되며, 펀잡어, 신드어, 푸쉬트어 등이 사용된다. 종교는 국교인 이슬람교 95%, 기독교 3%, 힌두교 1% 등이다.
산업은 쌀·소맥·면화 등을 주로 생산하는 농업국가로, 독립 후 공업화에 주력하여 방직·비료·시멘트 및 식품가공업 등 경공업 분야에 큰 성장을 이룩하고 있으나, 여전히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압도적이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2,88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1,513 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대통령 중심제와 의원내각제의 절충식인 공화제이며,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6년의 상원(100석)과 임기 5년의 하원(342석)으로 구성된다. 주요 정당은 파키스탄 인민당(PPP), 파키스탄 회교도연맹당(PML-N), 모하지드민족운동 등이다.
영국 식민통치하 인도의 독립운동 전개로 이슬람교도들은 독립 후 힌두문화의 지배를 두려워하여 1930년대 초부터 이슬람교국가의 분리독립이념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 후 파키스탄의 국부로 숭앙받고 있는 지너(Jinnah, M. A.)의 파키스탄분리독립정책에 따라 1947년 8월 14일 영국으로부터 파키스탄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독립 후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민정이 계속되다가 1958년 10월 칸(Khan, A.) 장군에 의한 군사정권수립 이후 1965년의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래 계속된 비상사태선포 및 반정부시위로 1969년 3월 육군참모총장인 칸(Khan, Y.) 장군에게 정권을 인계하였다.
그는 1970년 12월 총선을 실시하였으나, 그 결과 동·서 파키스탄을 분리시키는 사태를 초래하여 부토(Bhutto, Z. A.)가 이끄는 인민당이 승리하고, 동파키스탄에는 라만(Rahman, M.)이 영도하는 당이 대승하여 동·서 파키스탄의 양 지도자간 연립정부 구성에 관한 협상이 결렬되었다.
이에 따라 서파키스탄군이 동파키스탄에 진주하고 인도가 동파키스탄에 군사개입을 함으로써 1971년 12월 제3차 인도·파키스탄전쟁이 발발하였고, 파키스탄이 패함에 따라 동파키스탄은 분리되어 라만 영도하의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게 되었다.
한편, 부토정권은 1973년 4월 헌법을 제정하고, 주요 산업의 국유화조처, 노동자의 경영참여 및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노선을 추구하였으나, 막대한 전비 및 노동운동의 격화로 경제가 호전되지 않았다. 이후 1977년 3월 총선에서 압승하였으나 야당의 총선결과 불복선언 및 부토의 신임요구 등으로 심각한 정국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1977년 7월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1977년 대통령으로서 정권의 권좌를 차지한 지아우루 하크 장군은 전(前) 정권 말기의 정치적 혼란을 계엄령으로 억제하고 1979년 구소련군에 의한 이웃나라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용하여 미국으로부터 많은 양의 군사·경제 원조를 끌어들이고, 석유 파동에 편승하여 연 6%의 경제 성장을 달성하는 실적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1985년의 민정이관의 사이에 실시한 헌법 제8차 개정은 1973년 헌법에 근거하여 총리가 대표하는 연방정부의 행정권을 대통령 권한으로 하고, 헌법을 대통령제로 바꾸었다. 하크 대통령이 육군참모장을 겸임할 당시는 기능을 잘 발휘했던 이 헌법은 1988년 8월 하크 대통령과 1988년 12월 총선권에 의해 선출된 이스하크칸 대통령과 1988년 12월 총선거에 의해 선출된 초대 민선 여성 총리 베나지르 부토 사이에 알력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989년 8월에 군 최고의 인사를 둘러싸고 표면화된 알력은 1990년 8월 6일에 이르러 칸 대통령에 의한 부토 총리의 해임이라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칸 대통령은 부토 총리 해임 후 즉각 국회를 해산하고, 하원 총선거가 1990년 10월 실시되어, 보수 연합인 이슬람민주동맹(IDA)이 승리하였다.
이슬람민주동맹 총재인 샤리프 총리는 산업 육성, 교용 촉진, 공업화 추진 등을 목표로 한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발표하고, 자유화와 경제의 민영화를 추진함으로써 경제의 재건설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992년 4월 칸 대통령은 샤리프 총리를 해임하였고, 이에 맞서 샤리프 총리도 대법원에 위헌제소를 하였다. 1993년 5월 위헌 판결로 샤리프 총리는 복권하였지만, 군부 중재로 칸 대통령 및 샤리프 총리는 동시에 사임하였다.
1993년 10월 하원 및 지방의회 선거가 실시되어 베나지르 부토가 총선에서 승리하여 내각을 출범시켰다. 1993년 11월 레가리(Farooq, A. K. Leghari) 대통령에 이어 1998년 타라르(Mohammad Rafiq Tarar)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2008년 3월에는 현 자르다리(Asif Ali Zardari)이 2008년 9월 취임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있으며, 그 아래 실권자 길라니(Gillani) 총리가 2008년 3월 취임하여 내각을 이끌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중립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47년 유엔에, 1979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의 이슬람교화정책을 표방하며 건국이념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함으로써 대내적으로는 국민대중 정부지지를 유도하고, 대외적으로는 이슬람교권지도국으로서의 이미지 고양에 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파키스탄과 1968년 1월 총영사관 수립에 합의한 뒤 4월 주 이슬라마바드 총영사관을 설치하였고, 1969년 8월 주 카라치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파키스탄은 1980년 6월 서울에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이후 우리나라는 1983년 11월 7일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2007년 현재 상주공관을 개설하고 있다.
양국은 1983년 10월에 무역 협정, 1984년 3월에 해운 협정, 1985년 5월에 사증면제 협정, 경제기술과학협력 및 무역증진에 관한 협정, 1987년 4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1988년 5월에 투자보장 협정, 1996년 7월에 항공 협정, 1997년 3월에 경제협력증진 협정, 2003년 11월에 정보통신협력약정, 에너지 및 광물자원협력약정 등을 체결하였다.
우리나라는 1980년 이래 20만∼25만 달러 규모의 무상원조를 하였으며, 1979년 이래 수산협력, 1982년 봉제합작회사를 설립하는 등 경제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파키스탄에는 파·한친선협회가 이슬라마바드와 카라치에 있다.
우리나라의 대 파키스탄 수출액은 2015년 현재 7억 70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철강, 합성수지, 농의약품, 기계 등이고, 수입액은 4억 달러로 주종목은 천연섬유사, 면직물, 가죽 등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46명의 파키스탄 선수단이 참가하였으며 2015년 현재 삼성, 대우, 삼양사, 세일수산, 인성통상 등 여러 업체가 진출해 있고, 약 800여 명의 한국민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1972년 11월 19일 수교하였으며, 2007년 현재 상주공관을 개설하고 있다.
양측은 1969년 1월 바터무역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71년 2월 보도에 관한 협정, 1973년 6월에 문화 협정, 1974년 5월 항공 협정, 1982년 10월 경제 및 과학기술문화협조 협정, 1983년 2월 합작투자 및 기술협력 협정,1987년 8월 우편물교환 협정,1989년 5월 파인민당·북한노동당간협력 협정, 1991년 5월 의원교류 협정, 1992년 6월 공보방송 협정, 1998년 7월 해운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2000년 3월 문화교류합의서, 2007년 11월 카슈미르주수력발전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교환하였다.
북한의 대 파키스탄 수출액은 2007년 현재 1472만 달러로 주종목은 플라스틱·철강제품·기계류 등이고, 수입액은 106만 7000 달러로 주종목은 양모·면직·가죽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