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고종 3) 윤황의 9대종손 윤상작(尹相爵)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상헌(金尙憲)의 서문이 있고, 발문은 없다. 사실상 문집의 체재를 갖추고 있는데도 굳이 봉사라 제목을 붙인 것은, 저자가 정묘·병자 두 호란을 겪으면서 척화의 선봉에 섰던 인물로 유문 중 소문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1854년(철종 5)에 인행(印行)된 『팔송연보(八松年譜)』에도 연보 외에 저자 자신의 작품인 유사·만장·제문·시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2권 2책.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성균관대학교 도서관·국민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에 계사(啓辭) 11편, 소(疏) 12편, 논(論) 5편, 서계(書啓) 2편, 차(箚) 1편, 권2에 부록으로 서(書) 4편, 제문 4편, 기(記) 1편, 가훈 1편, 시 8수, 제문, 묘지명, 후기, 행장, 묘표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계사 가운데 사간 때 올린 「거분시탑전계사(去邠時榻前啓辭)」에서는 정묘호란 때 청군이 침입한 지 7일째 되던 정월 21일 인조에게 도성을 끝까지 지킬 것을 주장하며 강화 피란의 투안지계(偸安之計)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직간하였다. 바로 그 날 오후에 다시 올린 동명의 계사에는, 비록 안주(安州)와 평양이 적에게 떨어진다 하더라도 임진강의 지세와 수세를 잘 활용하고 임진이서(臨津以西) 수백 리간을 청야작전(淸野作戰)으로 임한다면 능히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군사 전략 등이 언급되어 있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살필 수 있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올린 「논거분등사합사계사(論去邠等事合司啓辭)」에서도 강도(江都) 피란을 극력 반대하고, 몽고가 침입했을 때 고려 조정이 입보강도(入保江都)한 것과 지금과는 사정이 판이하게 다르다고 말하면서, 그 때는 인심이 조정으로부터 이반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강홍립(姜弘立)과 같이 적을 향도하는 항장이 없었음을 들고 있다.
“오늘 적과 화의를 맺는다면 이는 말이 화의지 실지로는 항복과 다름없다.”고 극언하여 인조의 진노를 샀다는 「척화소(斥和疏)」로부터 마지막 차문인 「간원청경동진작차(諫院請警動振作箚)」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에 걸친 20여 편의 계사와 소차를 통해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병농산택(兵農山澤)과 경국제민(經國濟民)의 계책이다. 특히, 「간원청경동진작차」에서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에 의한 10만 양병을 주장하고, 구체적인 군비 조달 방법까지 숫자로 제시하고 있다. 임진왜란 전에 이이(李珥)가 주창하였다는 10만 양병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와 같은 그의 정신은 「계제자서(戒諸子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에서는 선비가 빈둥거리고 노는 것은 패가망신하는 병폐이니, 이번 난리를 경험 삼아 절대 구습을 밟지 말고, 이후로는 남녀 모두가 농사나 장사 또는 방적을 노비와 함께 하여 생업에 힘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제문 가운데에는 스승이자 장인인 성혼(成渾)과 김장생(金長生)에 대한 「제우계선생문(祭牛溪先生文)」과 「제사계김선생문(祭沙溪金先生文)」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