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릉비문」의 영락(永樂) 5년(395)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였는데,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유목민족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거니와, 일찍이 패려를 거란(契丹)의 속부(屬部) 중의 하나로 비정한 견해가 나온 이래 대체로 그를 따르고 있다.
구체적으로 거란의 고팔부(古八部) 혹은 기수팔부(奇首八部)가 고구려와 인접하여 살다가 서쪽으로 밀려 났다는 『위서(魏書)』거란전이나 『요사(遼史)』등의 기록에 의거하여 그 중의 하나인 필혈부(匹絜部 : 『통전(通典)』邊方 거란조에 나오는 匹黎部와 같음)를 패려에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위치에 대해서는 심양(瀋陽) 동남쪽으로 보는 견해, 서요하(西遼河) 지금의 시라무렌강 중상류설로 보는 견해, 요하 서쪽의 어느 곳으로 보는 견해 등이 나와 있다.
한편 이와는 달리 패려를 『진서(晋書)』 동이전에 숙신(肅愼) 서북쪽으로 300리 거리에 있었다고 나오는 패리국(稗離國)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그 위치를 치치하르 부근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