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적인 치료를 하는 데 사용되었던 고대사회의 의료기구 중 하나이다. 석침(石針)이라고도 하는데 구석기시대에 물고기를 잡고 수렵을 할 때에 쓰던 돌조각으로 피부의 표면을 찔러서 치료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에 접어들면서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석침은 점차 가늘어지고 치료에도 효율성이 있었을 뿐 아니라 환자의 통증을 약화시키는 데도 기여하였을 것이다. 점차 시대가 변하면서 골침(骨針)·죽침(竹針)을 사용하다가 도침(陶針)이 석침을 대신하였다. 금속기시대에 접어들면서 침의 기구에도 변혁이 일어나서 구리침〔銅針〕·철침(鐵針) 등으로 발전하고 은침(銀針)·금침(金針)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중국의 문헌에 의하면, 한나라 때의 한의학 기본서인 『소문(素問)』 권4 이법방의론(異法方宜論)에는 “동방은 병이 모두 옹양(癰瘍: 종기)으로 되어 있고 그 치료는 폄석으로 하는데, 폄석 또한 동방으로부터 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산해경(山海經)』 동산경조(東山經條)에 “고씨(高氏)의 산 아래에 잠석(箴石)이 많다.”고 한 것을 곽박(郭璞)이 주(註)한 것을 보면 “잠석은 가히 지침(砥針)이 되어 옹양을 치료한다.”는 것이다.
『소문』과 『산해경』의 저작연대를 추정해 볼 때에 이것은 고조선시대 후기에 해당되므로 이미 고조선에서 실시되었고, 그것이 다시 한나라에 전하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1929년 함경북도 경흥군 운기면 송평동에서 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그 출토품 중에 석촉(石鏃)·석침·골침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러한 물증은 당시 폄석술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폄석은 피부에 생기는 옹저(癰疸)·옹양이 화농되었을 때에 수술하는 외과적인 치료기구로 쓰였다. 당시에 이와 같은 방법은 크게 흥행되어 일반 화농성질환에 많이 활용하였다. 그러나 금속술의 발달로 사용하기 불편한 이 기구는 간편하고 효과적인 침 치료기로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