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대성산성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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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성산성 남문 정면
평양 대성산성 남문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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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양직할시 대성구역 대성산(大城山)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 시기에 능선을 따라 타원형으로 축조된 석축 성곽.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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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북한 평양직할시 대성구역 대성산(大城山)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 시기에 능선을 따라 타원형으로 축조된 석축 성곽. 산성.
내용

묘향산맥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한 지맥(支脈)이 대동강 북안에 이르러 끝나면서 높이 274m의 고지를 중심으로 대성산을 이룬다. 대성산성은 바로 이 대성산의 6개 고지인 소문봉·을지봉·장수봉·북장대·국사봉·주작봉 등을 연결하는 능선을 따라 타원형으로 축조된 석축산성(石築山城)이다.

성벽의 총 길이는 7,218m이고, 성 내의 총 면적은 2,723㎢로 우리 나라의 산성 중 규모가 가장 큰 편에 속한다. 형태는 집안(集安)의 환도성(丸都城)과 비슷하다. 이 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1958년 5월부터 약 3년간 5차에 걸쳐 북한에 의해 실시되었다.

대성산성의 주변에는 남쪽 1㎞ 거리에 안학궁지(安鶴宮址)가 있고, 서남방에 청암리토성(淸巖里土城)과 장안성(長安城)이 있고, 산성의 좌우편 구릉에 다수의 적석총(積石塚)·봉토분(封土墳)·벽화고분(壁畵古墳) 들이 떼를 지어 분포해 있다. 이로 볼 때, 대성산성은 평양지역의 고구려 도성(都城)과 짝을 이룬 중요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성벽의 축조방법은 지역마다 차이가 나 대략 세 가지의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성의 남쪽에 위치한 소문봉 성벽은 사각추(四角錐) 또는 사각추대(四角錐臺) 형태로 거칠게 다듬은 사암(砂岩)을 사용하였다. 기초부는 비교적 큰 석재를,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석재를 사용하였다. 지표부분의 성벽 너비는 33m 내외이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조금씩 더 넓어졌다. 지하에 묻힌 기초부에는 약 1.5m 거리마다 15∼20㎝ 정도의 공간을 만들어 지하수의 압력을 완화시켰다. 지하 토대로부터 현존 성벽 상부까지의 높이는 2.5∼4m 정도이다.

성벽 기초부에는 압력에 의해 성벽이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계단식 보강시설을 하였다. 외벽쪽은 큰 막돌을 사용해 성벽에서부터 경사를 따라 계단식으로 4∼5단을 쌓아 내려갔다. 하단간의 높이는 5.5∼1m, 너비는 1.5∼2m 내외이다. 이 보강시설의 표면은 토사로 덮여 있었고, 계단을 축조한 돌 사이에는 점토를 다져 넣어 견고하게 하였다.

성 내부에는 비교적 너비가 넓은 내황(內隍)을 만들어 놓았다. 원래의 성벽 높이는 적어도 5m 이상으로 추정된다.

둘째, 성 내 서편 주작봉의 남쪽으로는 남문지(南門址)에서 시작되는 약 980m 가량의 이중성벽이 있다. 재료와 성벽을 수직으로 곧게 쌓은 방법은 소문봉 성벽과 유사하다. 기초부는 암반(岩盤)이나 원토층까지 파 내려가 그 위로 비교적 큰 돌을 사용해 0.5∼1m 높이로 형성하였으며, 상부로부터의 압력을 막기 위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큰 돌을 버티어 놓았다. 구릉을 이용한 내탁공법(內托工法)을 사용해 내면에 막돌과 점토를 다져놓아 성벽을 고정시켰다.

셋째, 성의 서남쪽 계곡에 설치한 남문지의 160m 구간과 그 주변 경사지에 쌓은 약 100m 구간의 성벽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이었다. 성벽의 너비는 약 30m이다. 내외협축(內外夾築)을 하여 외측은 석재로 너비 약 4.6m, 높이 4m로, 내측은 너비 2.2m, 높이 약 3m로 축조하였다. 내외측 사이의 10여 m의 공간은 점토와 막돌로 메웠다.

기초부는 지하 1.3∼1.5m 깊이에서 축조하기 시작해 위로 올라갈수록 매 층 약 2∼3㎝씩 뒤로 물려 쌓은 계단식 물림쌓기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고구려 축성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은 약 5.5m이다.

남문지는 대성산성 4개 문지(門址) 중 가장 낮은 지역에 속한다. 성벽에서 20m 정도 凸형으로 돌출되어 있어 집안 환도성의 동문(東門)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성 내 북쪽에 위치한 북장대는 명칭과 입지조건으로 보아 장대지(將臺址)로 추정된다.

산성 내에는 10여 개의 연못이 있는데 그 중 6개가 동편 저지에 몰려 있다. 대체로 방형(方形) 또는 장방형이며 하부는 석재로 쌓은 반면, 상부는 흙을 사용해 방대형(方臺形)으로 조성하였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잉어못의 경우, 한 변이 27m되는 대형이며, 깊이는 현재 1m 정도지만 원래는 더 깊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의 주변 5∼6m 거리에는 예외없이 조잡하게 석축한 우물을 만들어 식수를 해결하였다. 성 내의 거의 중앙부에서는 곡창유지가 발견되었다. 이 곳에서는 다수의 고구려 적색 기와[赤色瓦]와 탄화(炭化)된 곡식·목탄(木炭)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곡식은 주로 조·수수·밀 등이었다.

또한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18개소가 있으며, 이들 건물지에서 많은 기와편[瓦片]이 수습되었다. 기와는 적색 점토로 만들었으며 문양이 다양해 약 20여 종으로 구분된다. 막새 중 암키와막새는 전혀 없었다. 기와의 문양이 다양하고 경도(硬度)도 각기 차이가 나는 것은 지역적 차이에 의한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성 내부의 건물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 또는 증축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성 내 북서쪽에 위치한 국사봉의 남쪽 성벽 근처에서는 소상(塑像) 2좌(座)가 발견되었다. 남상(男像, 臺座높이 2㎝)은 청동에 도금한 것으로 높이는 8.5㎝였다. 여상(女像, 대좌 높이 1.9㎝)은 앞면은 순금판으로, 뒷면은 순은판으로 되어 있었으며 높이는 5㎝였다.

이 둘은 5㎝×4.3㎝ 크기의 입구를 통해 내부를 8㎝×7.5㎝×11㎝ 크기로 토막(土幕) 내지 동굴처럼 판 15.7㎝×11.5㎝×15.3㎝ 크기의 석회석 내부에 안치되어 있었다. 둘 다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는 고구려시대의 불상조각으로서, 제작연대는 4세기 말∼6세기로 추정된다.

대성산성에서 출토된 막새의 문양은 고구려 태왕릉(太王陵)이나 장군총(將軍塚) 등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다. 그 태토(胎土)도 점토와 가는 모래가 혼합되어 고구려 중기 이후의 회청색토기(灰靑色土器)와 구분된다. 이를 근거로 축조시기는 대략 4세기 말∼5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다. →대성산성

참고문헌

『대성산일대의 고구려유적에 관한 연구』(채희국, 사회과학원출판사, 1964)
「대성산의 고구려유적」(김일성종합대학출판부, 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 및 민속학강좌』, 1972)
「高句麗の平壤城及ひ長安城について」(關野貞, 『朝鮮の建築と藝術』, 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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