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겸재집』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몸과 집을 엄정하게 다스려 촌부(村婦)들의 경박한 행동이 있으면 노복을 시켜 한 우물을 먹지 못하게 하였고, 이웃사람 중에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그곳을 지날 때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처음 성균관의 유생이 되어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실정을 개탄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 오로지 경사(經史)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여러 차례 불렸으나 사양하고 암천(巖泉)의 산재(山齋)에 살며 학문에만 힘썼다.
1662년(현종 3) 어사 남구만(南九萬)이 안계(安溪)로 하홍도를 방문하여 앞서 조정에서 있었던 예론(禮論)을 토의한 뒤, 그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여 현종에게 아뢰어 후한 상을 하사하였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또한,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일월성신(日月星辰)의 도수를 추정하여 시행되는 역법(曆法)을 시정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겸재집(謙齋集)』이 있다.
참고문헌
- 『겸재집(謙齋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 『현종실록(顯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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