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주관계사의 연구 ()

근대사
문헌
역사학자 이인영이 조선의 북방개척 및 만주와의 제반 교류 관계 등에 관하여 저술한 학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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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역사학자 이인영이 조선의 북방개척 및 만주와의 제반 교류 관계 등에 관하여 저술한 학술서.
개설

총274쪽. 1954년 10월 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의 『한국문화총서(韓國文化叢書)』 제13집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논문들은 저자가 학술지나 강의용으로 준비한 원고뿐만 아니라, 이곳에 처음으로 발표한 것도 있다.

내용

이 책의 체재를 살펴보면 앞에 손진태(孫晉泰)가 쓴 서문에 이어 본론에 해당하는 논문 7편이 장을 달리하여 게재되어 있다. 또한 부록으로 2편의 글이 실려 있다.

제1장 「임진왜란 이전 국내 문제와 대외관계」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에 조선이 직면한 대내외적 환경을 정치·경제·사회 등 각 방면에 걸쳐 서술하였다.

제2장 「여진무역고(女眞貿易考)」에서는 세종 말년 함경도의 육진(六鎭)과 평안도의 사군(四郡) 설치 이후 두만강과 압록강 기슭에 거주하던 여진과의 교섭을 주로 경제적 관계에 입각해 서술하고 있다.

즉, 여진의 조선에 대한 조공인 진상숙배(進上肅拜)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물산 교역을 목적으로 했으며, 진상숙배로도 물품의 부족함을 느끼는 여진을 위해 설치한 것이 무역소(貿易所)이다.

그리고 여진인이 목축과 수렵으로 얻은 천연산물을 조선에 가져온 데 대해, 조선에서는 주로 그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가공품을 제공하였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제3장 「폐사군 문제 관견(廢四郡問題管見)」에서는 1416년(태종 16) 여연군(閭延郡)의 설치로 시작된 사군이 1455년(세조 1)에서 1459년에 걸쳐 철폐된 것은, 종래에 주장된 것처럼 영토 포기가 아닌, 군사상 국경방어선의 후퇴와 법제상 사군관제를 폐지한 것일 뿐이며, 사군의 주민을 이주시킨 것은 사군의 경제적 이권의 일부만을 포기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제4장 「신숙주(申叔舟)의 북정(北征)」은 여진의 침입으로 단행된 1460년 신숙주의 여진정벌에 대해 북정발발의 원인으로부터 진행과정 등을 설명하고, 북정의 결과 삼수·갑산 방면의 방비가 충실해지고, 허수라천(虛水羅川 : 城川水 유역)의 개척에 착수하게 되었음을 논술하였다.

제5장 「성화3년역(成化三年役)과 조선군(朝鮮軍)」에서는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여진정벌계획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고 1467년 건주위(建州衛)를 공격한 것은 명나라의 요청에 따른 것만이 아니라, 세조가 조선의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는 여진에 대한 정토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그 동기의 하나임을 피력하고 있다.

제6장 「세조 때의 북방이민정책」에서는, 조선 초기에 적극적으로 시행되던 북방정책의 하나인 이민정책은, 범죄인을 평안·함경 양도의 변경에 옮겨 거주시키는 것과 하삼도(下三道 :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인민에 대해 특전을 주고 북방이주를 장려하는 두 가지 방침이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세조 때의 북방이민정책은 후자에 해당하는 경우로, 전후로 2차에 걸쳐 시행되어 황해도를 비롯한 관서지방에 1,700호 가량의 하삼도민이 이주하였다.

언어상으로도 유사점이 많은 경상도에서 함경도로의 이주경로는, 첫째 가장 편리한 통로인 동해안을 통하는 해로였을 것이고, 둘째 경상도 북부에서 동해안 지방을 거쳐 북상하는 육로가 있고, 셋째 가장 완만한 경로로서 육로로 관서 지방까지 간 뒤 다시 함경도로 넘어가는 길이 있었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제7장 「청조(淸朝)의 흥기(興起)」는 청나라가 태조 이래 1644년(인조 22) 북경(北京) 천도까지의 과정을 개관한 글이다. 이어서 부록에는 「폐사군지리고(廢四郡地理考)」와 「신충일(申忠一)의 건주기정국기(建州紀程國記)에 대하여」라는 글이 게재되어 있다.

전자는 정조 때의 성해응(成海應)의 시문집인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 수록된 「원영주일기(元永胄日記)」와 「이여절수본(李汝節手本)」을 이용, 여연군·자성군(慈城郡)·무창군(茂昌郡)·우예군(虞芮郡) 사군의 각 군치(郡治)의 위치·군의 강역·군내의 지명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후자는 1595년(선조 28) 신충일이 조정의 명에 의해 당시 만주 소자하(蘇子河) 유역에서 흥기중이던, 훗날 청태조의 거성(居城)에 이르러 그 실정을 정찰하고 돌아온 결과를 보고한 기록과 지도를 수록한 『건주기정국기』를, 1938년 신충일의 후손에게서 입수하여 그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은 일제의 오랜 강점을 탈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시의 학문적 수준으로 인해 서술된 내용의 상당 부분이 오늘날 수정, 재해석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초기 조선의 북방개척과 이민, 그리고 만주 지역과의 제반 교류 관계에 대해 광복 이후 처음으로 간행된 국내학자의 저술로서, 이후 해당 분야 연구에 많은 시사점을 준 점에서 학술사상의 가치는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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