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8월에 이병기(李秉岐)·홍순혁(洪淳爀)·김구경(金九經)·박봉석(朴奉石)·이재욱(李在郁)·송석하(宋錫夏) 등이 중심이 되어 서지학연구 및 도서관학에 관한 연구를 위하여 위원제도로 발족하였다. 설립 당시는 ‘한국서지학회‘라 하였으나, 1968년 5월 ‘한국서지연구회’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1970년 5월 다시 설립 당시의 명칭인 ‘한국서지학회’로 바뀌었다.
설립된 뒤 한 두 차례의 전시회와 연구발표강연회가 있었을 뿐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중 6·25전쟁으로 인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1959년 10월 국립도서관장실에서 다시 발기인 총회를 열고 재결성하였다. 이때 회장에 국립도서관장 김상필(金相弼), 부의장에 이병도(李丙燾), 평의원에 김두종(金斗鍾)·김상기(金庠基)·이희승(李熙昇)·신석호(申奭鎬)·최현배(崔鉉培) 등을 선출하였다.
재출발하면서 학회지 ≪서지 書誌≫ 제1권 1호를 1960년 2월에 발행하고, 2호를 같은 해 8월에, 제2권 1호를 1961년 10월에 발행한 뒤 계속하지 못하였으며, 그 동안 3회의 임원회와 제1회 고서전시회 및 몇 차례의 강연회를 개최하였을 뿐이다. 1960년 8월 문교부에 등록되었으나 또다시 휴면상태에 들어갔다.
그 뒤 1968년 5월 관훈동 147번지에 위치한 통문관(通文館) 2층에서 다시 한국서지학회를 재건할 목적으로 강상운(姜尙雲)·김약슬(金約瑟)·백린(白麟)·백순재(白淳在)·안춘근(安春根)·심우준(沈㬂俊)·이겸로(李謙魯)·이광린(李光麟)·이병주(李丙疇)·임종순(任鍾淳)·천혜봉(千惠鳳)·정형우(鄭亨愚) 등이 모였으며, 8월 31일 제3차 모임에서 이 회의 이름을 한국서지연구회로 결정하고 회지의 이름을 ≪서지학 書誌學≫으로 하였다.
국회도서관장 강주진(姜周鎭)이 회장이 되었으며, 1968년 9월≪서지학≫ 창간호가 발행된 뒤 매년 1회씩 발행하여 1974년 제6호까지 발행되었다. 그러나 1982년 제7호가 나올 때까지 8년 동안이나 학회의 기능이 마비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제7호가 나온 이후 현재까지 학회의 기능이 미진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