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원극(元極). 함경남도 영흥(永興) 출생이며, 아버지 한국섭(韓國燮)과 어머니 김대아(金大娥)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김길자(金吉子)와 자녀 2녀를 두었다.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될 뜻을 품고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이 학병제도(學兵制度)를 만들어 학생들을 전쟁터로 보내기 시작하자 학병을 기피할 생각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당국의 강압에 못이겨 1944년에 사병(士兵)으로 입대했으며, 곧 간부 후보생이 되어 견습사관(見習士官)중에 광복을 맞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북한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1946년 단신으로 월남한 뒤, 이름을 신(信)으로 바꾸고 사병으로 입대했다가 육군사관학교(경비사관학교) 제2기로 입교하여 육군소위로 임관되었다.
강원도 춘천에 있는 제8연대에서 소대장 및 중대장 겸무로 군대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조선경비대 군기사령부의 행정관을 지냈으며, 대대장으로 옹진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6·25전쟁 기간 중에는 중령 및 대령으로서 부연대장, 연대장, 사단참모장, 부사단장의 직책을 맡아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호남지구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수행했고, 1953년 말에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여 1954년에는 첩보부대장, 1955년 육군본부 수송감, 1956년 수도사단장, 1959년 감찰감을 역임하던 중에 육군소장으로 승진하였고, 1960년에 제2훈련 소장이 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으로서 내무부장관이 되었으며, 1963년에 잠시 감사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 뒤 1963년에 군대로 복귀하여 제6군단장에 보임되었으며, 1966년에 육군중장으로 진급하여 육군전투병과 사령관, 1968년 육군참모장, 1968년 제2군사령관과 1969년 제1군사령관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970년 제1군사령관 재직시 육군대장으로 승진했고, 1972년 합동참모본부 의장직을 수행하던 중 1975년에 예편하였다. 솔직 담백한 성품을 지닌 청렴결백한 군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군의 교육·훈련과 부하복지(部下福祉)에 많은 신경을 썼다.
군대의 제반 여건이 좋지 않던 시절에 강조했던 “부하들을 잘 먹여라(食). 잘 입혀라(衣). 잘 재워라(住). 교육훈련을 철저히 하라. 근심걱정을 해결해 주라.”는 그의 지휘방침은 유명하다.
전역 후에는 아세아자동차주식회사 사장과 대한중석광업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훈장으로는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 등 많은 상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