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증욕(汗蒸浴) 또는 발한욕(發汗浴)이 의료에 언제부터 이용되기 시작하였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문헌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이다. 세종 4년(1422) 8월 한증욕이 병을 고치는 데 효과가 있는지를 예조에서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또 세종 10년조에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 및 서울에 있는 한증소의 승인(僧人)들이 병증(病症)을 가리지 않고 땀을 냄으로써 간간이 사망하는 일이 있다.
이제 문외(門外)·경중(京中)에 각각 한 곳에 한증소를 두고 전의감·혜민국·제생원에서 그곳에 각각 의원 2인을 보내 그 질병의 상태를 본 다음 땀을 내게 하고, 만일 자세히 진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사망하였을 때에는 의원·승인을 막론하고 모두 죄를 물을 것이고 동서활인원 및 서울에 있는 한증소는 그대로 두겠다고 예조에 청하였기에 이에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 5년 대사승(大師僧) 명호(明昊)가 탕욕(湯浴)을 만들어 병자를 구료(救療:가난한 병자에게 의술을 베푸는 것)하겠다고 하였기에 왕이 집을 하사하여 욕실을 만들게 하였는데 명호가 그 일을 마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세종 9년 4월 한증승(汗蒸僧) 대선사(大禪師) 천우(天佑)·을유(乙乳) 등이 명호가 하려던 일을 계속하겠다고 청하므로 쌀 50석, 면포(綿布) 50필을 하사하여 고려시대부터 있던 관설재단(官設財團)인 보(寶)를 만들어서 그 이자로 가난한 병자를 구료하였고, 또 의원 한 사람을 매년 교대로 근무하게 하였다.
세종 11년 6월 동활인원의 한증목실(汗蒸沐室)이 좁으므로 대선사 혜일(惠一) 등이 존비남녀(尊卑男女)를 구별하여 3곳을 증축하고 석탕자(石湯子)를 설치하고자 하여 쌀 100석, 면포 100필을 청하였으나 쌀 100석만 주었고, 세종 12년 5월 호조에서 동활인원의 병자에게 오래된 쌀을 주지 말고 새 쌀을 주라고 하고 서활인원 한증소에서 쓰는 시목(柴木)의 운반을 편리하게 하였다.
세종 13년 2월 동서활인원이 병자·의원·한증승 등의 쌀을 감소시킨 일이 있었기에 논죄하였으며, 세종 27년 11월 묵사(墨寺)의 승(僧)이 병자용 한증소의 수리를 청하였는데 동서활인원에 이미 질병을 치료하는 한증소가 있고 묵사는 마을에 있어 승인의 거주에 불편하니 묵사를 폐하고 그곳의 기구와 보를 동서활인원에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
문종 1년(1451) 7월 경기도 평원(平原)·교하(交河)·개성부 등에 나쁜 병이 돌았는데, 약제와 침구(鍼灸)만으로 치료하면 효과가 없으니, 개성활민원(開城活民院)을 수리하여 병자를 모아 원에 따라서 목욕증위(沐浴蒸熨)의 방법을 겸하도록 하였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한증소는 세종 때부터 관설재단인 보의 재원으로 관의 보호·감독 아래에서 활인서와 시중에 설치하여 질병의 구료에 이용되었고 그곳에는 의원 외에 승인, 즉 한증승이 있어 모든 일을 맡아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래식 한증원의 가열연료는 소나무가지를 쓰며 욕실 중앙 바닥에서 연소시켜 밀폐된 욕실 내 공기와 주위의 구조물을 가열시킨다.
이 때 연소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전실로부터 지하에 매설된 토관풍도를 통하여 공기를 보낸다. 이리하여 일정한 온도에 도달하면 물을 뿌려 불을 끄고 이때 발생하는 수증기로 탕내의 공기는 가열, 가습(加濕)되며 남은 불재를 전실로 끌어낸 다음 바닥에 가마니 또는 멍석을 깐 다음 다시 물을 뿌린다.
이전에는 이 위에 다시 소나무가지를 고루 펴서 깔았다고 한다. 입욕자는 맨몸에 헝겊 또는 가마니를 둘러 감고 들어가 솔잎 위에 누워 땀을 낸다.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개 4∼5분 정도 땀을 낸 다음 일단 몸을 식히고 입욕을 반복한다.
오늘날에도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한증원(汗蒸院) 또는 한증막(汗蒸幕)이라는 이름으로 산재하고 있어, 사람들이 질병의 구료, 즉 증열(蒸熱)로 인한 발한(發汗)으로 신경성통증의 경감·치료, 또는 신진대사를 왕성하게 하는 효과를 보려고 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