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걸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러시아공산당원, 고려혁명군정청 위원 등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2년(고종 34)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연해주
정의
일제강점기 러시아공산당원, 고려혁명군정청 위원 등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 군 얀치헤 마을(지금의 하산 구역) 출생. 빈농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러시아 고등보통교육을 이수하고 1915년 징집되어 1916년 11월까지 독일전선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11월부터 1917년 5월까지 키에프 군사학교 부설 강습소에서 공부하였다. 졸업 후 준위로 임관되어 시베리아저격연대에서 복무하였다. 1918년 2월 제대한 후 올가군 니콜라예프카 마을(지금의 파르티잔스크 구역)로 이주하였다. 그 해 조직된 니콜라예프카 촌 소비에트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지역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자위대를 조직하고 일류호프 부대와 엽합해 백위군과 맞서 전투하였다. 한창걸은 36명의 대원으로 1919년 4월부터 활동을 시작했는데 몇 달 뒤에는 대원수가 80명으로 늘어났다.

한창걸의 부대는 뻬레치노 마을에서 콜차크의 부대와 전투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이 때에 승리를 거두었다. 또 카잔카에 들어온 미국개입군과도 전투를 벌였다. 한창걸은 1919년 여름 콜차크 백우파 정권에 반대하는 봉기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일본군에 인도되었지만 1920년 1월 빨치산이 도시를 점령하자 풀려났다.

그 후 한창걸은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라조와 일류호프의 지시를 받고 한인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였다. 이 부대를 제1극동연대 산하 대대로 개편하고 수청 올가 지역에서 참전했으며, 1922년 4월 올가만 해방전투에 참가하였다.

9월 노령에 흩어져 있는 한인 빨치산 부대를 망라해 고려혁명군정청이 구성되자 위원이 되었으며 군정청 직속 제2고려혁명군의 지휘를 맡았다. 내전 후 농업코뮤나 “붉은 별” 건설에 참여하였다. 그 후 체카, 내무부 기관에 근무하였다. 비로비잔 유대인 자치주 내무부장을 지내기도 했으나 1930년대 후반 숙청당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편, 창작과 비평사, 1996)
『일제하 극동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마뜨베이 김, 이준형 역, 역사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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