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의 건설업체들이 인력과 건설기자재를 자국에서 가지고 가거나 또는 외국에서 조달하여 해외에서 벌이는 건설사업인 해외건설은 해외건설공사와 해외건설용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해외건설촉진법」에는, 해외건설공사는 해외에서 발주되는 토목·건축 및 산업설비와 철강구조물, 전기통신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으로, 해외건설용역은 해외건설공사의 조사·계획·설계·구매·조달·감리·시운전·평가·자문과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것이라고 각각 규정되어 있다.
한편, 해외건설업은 원도급(元都給)·하도급(下都給), 그 밖에 명칭 여하에 불구하고 해외건설공사 또는 해외건설용역을 도급하는 영업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해외건설 능력이 배태되고 그에 따라 해외건설 진출이 이루어진 것은 상당히 긴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인용할 수 있는 기록이나 증언 등을 통하여서 볼 때 해외건설의 발자취는 광복 이후부터나 추적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광복 이후 오늘날까지를 5기로 나누어 해외건설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는 광복 이후 약 20년 동안으로서 외국원조를 재원으로 전후 복구사업과 경제개발계획이 시도되었으며, 동시에 우리나라 업체들이 주한유엔군의 군사관련 건설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장차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경험이 축적된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에는 6·25전쟁과 5·16군사정변 등의 정변으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됨으로써 건설업의 성적은 부진하였다.
다만, 휴전이 성립된 이후 유엔의 원조로 복구사업이 추진되고 유엔군이 직접 군사관련공사를 발주함으로써 잠시나마 건설업이 회생될 수 있었다. 유엔군의 공사는 항만·비행장·도로·막사·교량·창고 등의 신축 내지 복구공사였는데, 주요 공사는 미군 공병단이 담당하고 우리나라 업체들은 비교적 단순한 토목·건축 공사를 맡았다.
여기는 경남기업주식회사와 삼환기업주식회사 등이 주로 참여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업체들이 유엔군공사를 수행하면서 해외진출을 위해 다각적인 훈련을 쌓을 수 있었다.
우선, 유엔군은 국제표준계약서식과 국제표준시방서(國際標準示方書) 및 설계도를 응용하고, 계약과 감리에 영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업체들이 국제적인 계약 및 시공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또, 미군 공사의 입찰에는 입찰단가와 견적서를 첨부해야 했기 때문에 공사견적능력이 향상될 수 있었으며, 계약은 일괄도급방식을 채택함으로써 통합적인 공사관리기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군 공사는 거의 기계화시공을 의무화하였기 때문에 현대적인 장비의 사용법도 익힐 수 있었다.
특히, 1960년대 초에는 규모가 큰 공사에 대해서는 미군과의 합작을 요구하자 우리나라 업체간에 또는 미국 업체와의 합작사업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 나라 건설업 부문에서 최초의 합작사업은 경남기업주식회사·삼환기업주식회사·부영건업주식회사 등 3개 회사가 맡은 미군시설공사였다.
월남전이 격화되면서 미군 공병단이 월남으로 사업무대를 옮김으로써 미군 공사가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당시 우리나라 업체들이 미군과 맺은 인연이 그 뒤 동남아시아와 중동으로 진출하는 데 길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건설업체들은 1956년 마닐라에서 한국·오스트레일리아·일본·필리핀·대만 등 5개국의 건설업체들이 창설한 아시아 태평양건설협회국제연합회(IFAWPCA)의 산파역은 물론, 그 뒤 이 기구의 운영에 주도적인 소임을 담당했는데, 이러한 국제활동이 이후 우리 업체들의 동남아시아 진출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 기간은 1965년 현대건설주식회사가 태국의 도로공사를 수주함으로써 우리나라 해외건설의 막이 오른 이래 삼환기업주식회사가 월남에서 철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도로공사를 수주하여 중동진출이 시작된 때까지를 일컫는다. 특히, 이 기간에는 우리나라의 월남파병(1965∼1972)과 우리나라 전후 복구사업을 할 때 맺어진 미군 공병단과의 인연을 계기로 월남에서 공사를 수주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태평양연안국가들을 비롯하여 알래스카까지도 진출하였다. 한편, 이 기간에 국내에서는 제2차 및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추진되어 농지조성과 수리 및 간척사업·도로·항만·전력·통신·지하철 등 사회간접자본과 공용·상용 건물 및 주택과 호텔, 그리고 각종 공업시설이 지속적으로 건설되거나 확대되었다. 그런데 이들 공사가 대부분 외국차관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 건설업자들의 건설능력이 더욱 배양될 수 있었다.
즉, 차관공사는 설계에서부터 시공관리까지 차관공여기관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만 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업체들이 국제수준의 기술을 접할 수 있었으며, 대개가 이자부담 때문에 공사기간이 철저하게 지켜져야 했으므로 우리 나라 업체들의 공사관리능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이 시기에는 우리나라 해외건설 업체들이 유럽지역을 제외한 전세계에 진출하였고, 특히 중동진출이 크게 활기를 띠어 해외건설 수주액이 절정에 달함으로써 양적이 면에서 우리나라 해외건설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외건설이 급격히 확대된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첫째, 1970년대 초 월남전이 끝나자 우리나라 업체들은 그 나라에 송출되었던 인력과 장비를 활용하기 위해 월남 이외의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하였다. 둘째, 두 차례의 석유파동, 특히 제1차 파동으로 불경기가 심화됨으로써 국내 실업이 늘어났으므로 고용의 증대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였다. 셋째, 1960년대 이후 외채가 누적된 데다 석유파동으로 석유수입 부담이 늘어남으로써 국제수지 적자폭이 계속 증대되었다.
끝으로, 외적인 요인으로서 유가(油價)의 폭등에 따른 ‘중동건설의 붐’이 형성되었다. 특히 정부가 「해외건설촉진법」의 제정과 해외건설협의회설립 등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함과 동시에 지급보증과 현지금융 및 조세감면 등 금융·세제면에서 적극 지원함으로써 해외건설이 급성장하는 데 크게 뒷받침되었다. 이 기간에는 주로 중동의 주요 국가에 진출이 이루어졌으며, 멀리 아프리카와 중남미까지 영역이 확대되었다.
이 시기는 1960년대의 ‘월남특수(越南特需)’와 ‘중동건설의 붐’을 계기로 급성장했던 우리나라 해외건설이 내외적 요인에 따라 수주량과 진출업체 수가 감소하는 기간이다.
즉, 우리나라 해외건설 수주액은 1981년의 137억 달러에서 1982년에는 114억 달러, 1983년에는 104억 달러, 1988년에는 16억 달러로 크게 줄었다가, 1990년에는 리비아에서 약 47억 달러 상당의 수로공사를 따냄으로써 약 70억 달러로 급증했을 뿐 그 후 매년 줄어들어 1992년에는 28억 달러로 다시 급감하였다.
이와 같은 해외건설 수주의 축소를 가져온 내적 요인으로는 우리 업체들의 국제경쟁력 약화를 들 수 있다. 사실 해외진출 경험이 전혀 없는 업체들이 무모하게 중동에 진출, 그 실력이 한계에 달하여 많은 업체들이 부실공사를 자초하였다.
더불어 1979년 이래로 장기적인 국내 불황과 경제운영의 ‘자율화’ 내지는 ‘민영화’ 시책에 따라 해외건설업에 대한 정부지원도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한편, 해외건설 퇴조의 외적 요인으로는 중동산유국들의 석유수입 감퇴에 따른 개발계획 축소와 건설공사 발생량 감소를 들 수 있다. 또한, 이들 산유국들이 자국화정책이 강화된 데다 공사대금지급을 지연시키고 있어 우리 업체들의 자금부담을 가중시켰다.
특히, 장기간에 걸친 세계적인 불경기로 선진국이나 후진국 다같이 국제수지를 개선하고 실업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중동진출을 강화함으로써 우리 업체들의 수주가 어려워졌다.
1992년까지 감소했던 해외건설 수주액은 1993년부터 다시 증가하기 시작해 1997년에는 사상 최고인 140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해외건설 수주액이 크게 증가했던 1982년에는 수주액 가운데 약 85%가 중동지역에서 달성되었고 아시아 지역에서의 수주액은 14.3%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97년 수주액 중에서는 아시아 지역 수주액의 비중이 59%로 급증한 반면 중동 지역 수주액의 그것은 6.5%로 낮아졌다.
또한 1997년에는 북미와 중남미 및 유럽에서의 수주액 비중도 각각 4%, 10% 및 18%로 늘어나 수주지역이 1980년대의 중동 편중에서 범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1981년, 1993년 및 1996년 중에 수주액을 공종별로 분류해 보면 토목공사의 비중은 24.5%에서 46%로 급증했다가 다시 21%로 낮아졌고, 건축공사의 비중은 65%에서 32%로 감소했다가 다시 40%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발전소나 화학공장 또는 담수화시설 등 특수공사의 비중은 상기 연도 중 각각 8.4%에서 16.7%, 36.7%로 크게 증가하여 해외건설공사의 내용이 건실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해외건설업체들이 해외공사장에서 채용한 인력의 구성을 보면 우리나라 인력의 비중이 1987년 96.5%에서 1996년에는 8.7%로 크게 낮아져 해외공사의 외화가득률이 그만큼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해외건설은 불과 2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양적으로 급성장하였다. 해외건설업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국제수지를 개선하였고, 국민소득 증대에도 큰 몫을 해냈다. 특히, 해외건설업에 취업한 국내 인력이 한때는 17만 명에까지 이르러 고용증대에도 크게 기여해왔다.
그러나 1981년 말을 고비로 1992년까지 해외건설 수주액은 계속하여 감소하고, 수주액이 감소함에 따라 수입이 줄어든 데다 공사대금 지급이 지연되는가 하면 장기어음이나 원유에 의한 지급이 증가하기도 하였다.
특히, 부실 공사 등 우리나라 업체들의 잘못으로 미수금이 누적됨으로써 일부 업체들은 자금난으로 도산하였고, 일부 업체들은 아예 해외시장에서 철수하였으며, 전반적으로 해외건설업체의 경영이 부실해졌다. 예컨대 해외건설업체들의 매출액경상이익률(賣出額經常利益率)이 떨어져 제조업 부문 평균보다 크게 밑돌게 되었다.
위 기간중 우리나라 해외건설업이 침체에 빠지게 된 것은 해외건설의 주무대인 중동건설시장에서 공사발주량이 급감한 데 기인한 것이나, 우리나라 업체건설의 경쟁력 약화와 방만한 경영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선진 경쟁국들에 비하여 너무 많은 업체들이 해외에 진출하였다.
많은 업체가 진출함으로써 수주액은 증대될 수 있었지만 과당경쟁이 불가피하여 수주단가가 낮아지고 한정된 기술인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으며, 국내 금융기관이 지급보증 능력을 무리하게 초과함으로써 금융업의 부실화까지 몰고 왔다. 그러나 1993년부터는 해외건설 수주액이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1997년에는 사상 최고인 140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해외건설의 재도약은 아시아지역으로부터의 수주액 증가로 비롯되었으며 중남미와 북미 및 유럽까지 수주지역이 다변화하였고 수주공종도 발전소나 담수화공장 등으로 고급화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해외건설업체들은 국내임금의 급상승으로 해외공사를 거의 외국인력에 의존함으로써 외화가득률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따라서 또한번 도약의 전기를 마련한 해외건설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국민경제의 성장에 대한 기여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업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한 기술개발 등 경쟁력의 제고와 현대적인 경영기법의 도입, 특히 건설업계의 해외시장에 대한 분석 및 전망 능력의 함양이 시급한 과제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