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이후 정부가 해외동포모국방문사업을 적극 추진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1971년 8월 이후 남북한간에는 적십자회담이 개최되고 남북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1천만 이산가족들의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한 토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북한적십자사측이 요구하는 정치적 ‘선결조건(반공법·국가보안법 철폐, 반공정책 중지, 반공단체 해산 등)’ 때문에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대한적십자사측은 이에 의해 “대한민국의 내정문제가 인도주의 문제의 해결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밝혔으나 북한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1973년 8월 28일에는 끝내 회담마저 중단시키기에 이르렀다.
한국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국내법이 인도주의 문제의 해결에 실제로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행동으로 실증해 보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1천만 남북이산가족찾기운동을 보다 활발히 전개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둘째, 1960년대 이래의 성공적인 경제건설과 새마을운동 전개 등으로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의 조국방문을 받아들여도 된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선의의 경쟁’, ‘인도주의 문제의 해결’ 구상을 밝힌 1970년의 8·15선언, 대공산권 문호개방을 천명한 1973년의 6·23선언, 1974년 9월 1일의 대공산권 우편물교환업무 개시 등이 그러한 자신감을 나타낸 실례들이다.
셋째, 36년간의 일제식민지통치와 제2차세계대전의 산물로 일본지역에는 약 80만의 동포들이 살고 있는데, 그 중 절반에 달하는 조총련계 동포들은 그 출신이 대부분 남한지역이면서도 북한을 지상천국으로, 남한을 생지옥으로 선전하면서 극단적인 반한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정부는 이들의 허위선전이 조국의 발전상을 잘 모르는 데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하고 인도적 차원의 고향방문을 허용, 조국의 현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할 필요성을 느꼈다. 1975년 9월 추석을 기하여 주일공관과 민단의 주선으로 조총련계 동포 720여 명의 첫 모국방문이 실현되었다.
부산항과 김포공항은 이들의 가족상봉으로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들의 성공적인 모국방문 결과는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귀국을 망설였던 조총련계 동포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그 뒤 모국방문 희망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1975년 추석에 시작된 이들의 귀국행렬은 이듬해인 1976년 한식 때까지 불과 6개월 사이에 무려 7,000여 명을 넘어섰다.
당초 이 사업은 정부주도하에 시작된 것이었으나, 이와 같은 모국방문 희망자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이를 지속적으로 담당할 민간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6년 3월 사단법인 재일동포모국방문추진위원회(회장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창립되고, 그 이듬해인 1977년 3월 28일에는 이를 해외동포모국방문후원회로 확대개편하였다. 재일동포뿐 아니라 공산권 등 모든 해외동포들의 모국방문을 후원하는 기구로 발전한 것이다.
모국방문사업은 지리적·정치적 여건상 재일동포로부터 먼저 시작되었으나, 점차 중국거주동포와 소련거주동포들로 확대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는 1975년 대공산권 우편물교환업무 개시와 때맞추어 중국에 친족을 두고 있는 국내 연고자로부터 중국거주동포(주로 옛 만주지역)들의 귀국진정서를 접수, 혈육상봉 등 많은 방문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러시아령(구소련) 사할린에는 5만여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는데, 그 중 약 3,000여 명이 귀국을 희망하고 있었으나, 한·소관계개선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소련의 붕괴로 이제는 여러 동포가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현재 모국방문 사업추진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1990년 한·러관계 정상화와 함께 우리민족이라는 동포애와 국가의 애정어린 관심에 따라 보다 실질적인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