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천(陽川). 경기도 김포 출신. 아버지는 희선이고, 어머니는 이선이다. 부인은 조선옥이며, 2남 2녀를 두었다. 평안북도 선천에서 금광에 성공한 사업가 집안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종교는 기독교이다. 제일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 유학 도중 중퇴했다.
1930년대 계용묵(桂鎔默)·정비석(鄭飛石)과 함께 동인지 ≪해초≫의 창간에 참여했으며 이 밖의 문단 친우로는 황순원(黃順元)·오영수(吳永壽)·원응서(元應瑞) 등이 있다. 6·25를 전후하여 출판사를 경영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숙명여자대학교에 잠시 출강한 바 있다.
1935년 ≪조선문단 朝鮮文壇≫에 단편 <무지개와 오뉘>를 발표함으로써 등단한 뒤, 그 이듬해인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현상에 필명 김혜숙(金惠淑)으로 응모한 시 <밀밭 없는 동리>가 당선되었다.
이후 1947년 ≪백민 白民≫에 발표한 <하일 夏日>에 이르기까지 30편의 시를 발표했다. 1937년 단편 <마적 馬賊>을 ≪조선문단≫에 응모해 수석 당선되었으나 일제의 검열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하였고, 이 사건으로 ≪조선문단≫이 폐간되었다. 1938년 9월부터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야한기 夜寒記>를 연재했으며 1949년≪민성 民聲≫에 평론 <천재의 반성>을 발표하였다.
1946년 ≪개벽 開闢≫에 단편 <비는 구름장마다>를 발표함으로써 집필을 재개한 뒤 1951년 고혈압 발병 전까지 <실락원>(개벽, 1948.5)·<유두>(민성, 1948)·<문화사대계>(민성, 1949.3)·<옛마을>(문예, 1949.8)·<해녀>(문예, 1950.2)·<길 주막>(문예, 1950.12) 등 10여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발병 이후 절필하다가 1966년 5월 ≪문학 文學≫에 단편 <조사(釣師)와 기러기>로 활동을 재개했으며, 같은 잡지에 1966년 8월부터 8회에 걸쳐 장편 <구관조 九官鳥>를 연재하였다.
1974년 ≪현대문학 現代文學≫에 연재한 장편 <타인(他人)을 대행(代行)하는 두뇌(頭腦)들>로 작품 활동을 마감했다. 마지막 두 작품과 단편 <초인 草人>이 단행본 ≪구관조≫(문학과 지성사, 1979)에 수록되었다.
허윤석의 소설 활동은 1951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유두>·<옛마을>·<문화사대계>·<해녀> 등으로 대표되는 전반부의 작품에서는 시적인 언어 감각과 서정성이 두드러지며 간결한 구성과 상징으로 직조된 압축된 소설미학을 구현한다.
소재적으로는 원시적 감각과 토속성이 두드러지는가 하면, 역사적 사건이나 정황도 간과되지 않는데, 작가의 말대로 “시라는 아메바가 현실을 흡수”한 데서 나오는 특유의 산문정신과 자연적 본성과 사회성 사이의 갈등을 아우르려는 현실 해석을 표현하고 있다.
후반부에 쓰여진 작품들은 장편 <구관조>를 중심으로 일종의 연작 형태를 띠고 있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현실과 인간의 핵심문제를 천착하고자 하는 이들 작품에서 현대의 과학·종교·사회 및 역사의 문제가 이들 작품에 공히 등장하는 인물 한갑수의 사유의 대상이 된다.
현실과 꿈, 각성과 환상, 죽음과 삶, 과거와 현재, 자아와 타자가 뒤섞이며 사변적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의 자유분망한 구성 속에 자전적인 요소들이 폭넓게 삽입되어 있으며, 이전에 쓰여진 작품 속의 인물과 상황이 새로운 조명 하에 등장한다.
현대적 인간과 현실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해부와 소설쓰기 자체에 대한 각성이 중첩되는 이 작품은 “현대문학의 습성을 탈피”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대로 한국문학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실험적 작품 세계를 제시했다.
뇌경색증으로 사망했으며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대지공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