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양구군, 서쪽은 철원군과 경기도 포천시 · 가평군, 남쪽은 춘천시, 북쪽은 철원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7°26′∼127°55′, 북위 37°59′∼38°17′에 위치한다. 면적은 908.66㎢이고, 인구는 2만 7020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4개 면, 84개 행정리(40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 소재지는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화천읍 아리이다.
군의 대부분 지역이 산지로 되어 있다. 동쪽에는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어 일산(日山, 1,150m) · 재안산(在安山, 1,060m) · 사명산(四明山, 1,198m) · 수리봉(922m) 등이 솟아 있다. 서쪽에는 경기도 포천시와의 경계에 광덕산(廣德山, 1,046m) · 백운산(白雲山, 904m)이 있다.
남쪽에는 오봉산(五峰山, 779m) · 용화산(龍華山, 878m) · 화악산(華岳山, 1,468m) · 매봉(1,436m) 등이 있다. 북쪽에는 대성산(大成山, 1,175m) · 적근산(赤根山, 1,073m) · 백암산(白巖山, 1,179m) 등을 연결하는 광주산맥(廣州山脈)이 연봉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대체로 북동쪽은 높고 남서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진다.
하천으로는 군의 동부지역을 남류하여 흐르는 북한강이 있다. 그 지류인 마현천(馬峴川)은 적근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남류하면서 마현리 · 산양리 · 신읍리를 지나 상리에 이른다. 대성산과 복계산(福桂山, 1,057m)의 동쪽 수피령(水皮嶺)에서 발원한 봉오천(峰吾川)이 동류하면서 상리에서 마현천과 합쳐져 하리에서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북한강에 건설된 화천댐으로 형성된 파로호(破虜湖)에 의해 많은 지역이 수몰되어 평야는 거의 없다. 마현천 · 봉오천이 중남부에 약간의 곡저(谷低) 지대를 이룬다. 남서부의 사내면과 간동면에 작은 산간분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간동면의 간척리 · 오음리 · 용호리 일대의 산록 완사면 지형은 중요한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기후는 내륙 산간지대에 위치하므로 기온의 연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의 성격이 강하다. 연평균 기온 9.4°C, 1월 평균기온 -7.2°C, 8월 평균기온 26.4°C이며, 연 강수량은 1,064.8㎜이다.
구석기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된 적은 없으나 인접한 홍천군의 홍천강유역에서 5만∼10만 년 전의 중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인류가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 초에도 낭천군이라 불렸으며, 춘주(春州)의 속군(屬郡)으로 되었다가 1106년(예종 1)에 비로소 감무(監務)가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모든 감무가 현감(縣監)으로 개칭됨에 따라 현감이 파견되었다. 세조의 왕위찬탈이 있은 뒤에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세조의 그릇된 처사에 분개하여 사내면 삼일리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지냈다. 1644년(인조 22)에 폐현(廢縣)되어 김화현(金化縣)에 합쳐졌으며, 1653년(효종 4)에 다시 낭천현으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춘천부(春川府)의 관할로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강원도에 소속되면서 화천군으로 개칭되었다. 1910년 3월에는 동면(東面)과 간척면(看尺面)이 병합되어 간동면으로 되고, 남면(南面)과 하동면이 병합되어 하남면(下南面)이 되었다.
1919년 3 · 1운동이 발발하자 화천군에서는 화천읍 신읍리 · 풍산리와 상서면 봉오리 등지에서 3월 23일과 28일 두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23일의 시위는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었고, 28일에는 선비 · 청년 · 농민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 때 시위에 참여한 연인원은 3,500명으로 추산된다.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3월 초에 평강 천도교구에서 전달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3월 중순 이후에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 과정에서 천도교인뿐 아니라 한말 의병 출신자까지 가담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공산치하에 들게 되었다. 6 · 25전쟁 때 국군의 북진으로 수복되었다. 1951년 5월에 있었던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소양강전투는 특히 치열한 것이었다. 이 때 중공군이 2개 군단 병력을 투입하여 대공세를 취해왔으나,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화천수력발전소를 탈환하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전선에 와서 장병들을 격려하고 친필로 써준 ‘破虜湖(파로호)’라는 제자(題字)가 간동면 구만리의 기념비에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후 수복되어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다.
1954년 10월 21일에는 춘성군 사내면이 편입되었고 면 사이에 일부 관할구역 개편이 있었다. 1964년화천면의 동촌출장소와 간동면 구만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9년 5월 1일화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5월 1일에 화천읍 동촌출장소가 없어지고 하남면 강남출장소가 개소되었다. 1998년 강남출장소와 구만출장소가 폐지되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 곳곳에서 신석기시대 이후에 사람이 거주한 흔적이 찾아진다. 하남면의 위라리에서 1964년에 간돌도끼와 돌공이가 출토되었다. 용암리에서는 선사주거지가 발견되었으며, 간동면 유촌리에는 고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산성지로는 간동면 유촌리 용화산에 산성이 있는데, 부족국가시대에 맥국의 왕이 난을 피하기 위해 강돌로 축성한 것이라 한다. 그 밖에 상서면 산양리의 대성산성과 화천읍 하리의 생산성(牲山城)이 있다.
현존 사찰로는 법천사(法天寺) · 금룡사(金龍寺) · 관음사(觀音寺) · 대성사 · 대명사 등이 있다.
불교 유산으로는 하남면의 화천계성리석등과 위라리칠층석탑이 있다. 원천리의 용봉사지(龍鳳寺址)에는 주춧돌만 남아 있는데, 6 · 25전쟁 전까지는 13층석탑이 있었으나 공산치하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화천계성리석등은 1968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위라리칠층석탑은 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그 밖에는 하남면 계성리의 계성사지(啓星寺址), 화천읍 풍산리의 보련암지(普蓮庵址), 동촌리의 운봉사지(雲峯寺址), 간동면 오음리의 오음사지(梧陰寺址)가 있다. 유촌리 성불사지(成佛寺址)에는 화천성불사지석불입상(강원도 유형문화재, 1996년 지정) · 화천성불사지석장승 등이 있다. 화천성불사지석장승은 1996년 강원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유교 유산으로는 화천읍 하리의 화천향교, 사내면 삼일리의 화천화음동성사지가 있다. 용담리에는 조선시대에 서원이 있었던 터가 있다. 이밖에 화천읍 하리의 칠성루, 사내면 삼일리의 삼일정이 있다. 화천향교는 1985년 강원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고, 화천화음동성사지는 1990년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신읍리에는 1919년 3월 23일에 화천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3 · 1운동 시위지가 있다. 화천읍 대리리에는 6 · 25전쟁 당시의 격전지였음을 보여주는 643고지전투전적비(高地戰鬪戰蹟碑)가, 간동면 구만리의 파로호변 정상에는 높이 12m, 너비 6m의 파로호기념비(破虜湖紀念碑)가 있다.
보호수로는 화천읍 동촌리에 수령 300년 된 느티나무, 신읍리에 수령 240년의 물푸레나무, 상서면 봉오리에는 300년 된 서낭당 소나무가 있다. 또한 열목어와 황쏘가리가 희귀어종으로 보호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은 화천읍 하리에 화천향교가 있다. 신교육기관으로는 1906년 사내면에 개교된 사내학교(史內學校)가 최초이다. 1908년 율촌공립보통학교에 이어 1912년 화천공립보통학교가 개교되어 각각 오늘의 율촌초등학교와 화천초등학교로 이어져오고 있다. 이를 계기로 군내에는 1면 1개교의 교육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1953년에 간동중학교가, 1955년에 화천종합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3개교, 중학교 4개교, 고등학교 4개교가 있다.
화천문화원은 용화축전 · 문화논단 · 초청강연회 등 각종 문화예술행사를 주관하고 자료연구를 통해 향토문화의 계승 ·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군립문화관이 있어 문화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이 고장의 대표적 민속놀이로는 거북둔지의 농목장치기 · 횃불싸움 · 농악놀이 등을 들 수 있다.
거북둔지는 화천군에 있는 지명이고 농목장치기는 이 마을에서 행하던 장치기놀이이다. 전승이 중단되었다가 최근 군민의 축전인 용화축전을 통해 재현되었다. 먼저 마을 청년들이 산에 가서 화목을 지게에 한짐씩 져서 경기장에 쌓아두고 두 패로 나뉘어 장을 친다.
장채는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지겟작대기를 그대로 사용한다. 장을 상대방의 문에 쳐 넣으면 승리를 하게 되어 상대의 화목까지 모두 차지한다. 예전에는 이 놀이가 매우 성행하여 하루종일 걸렸다 한다. 지면 빈 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이기면 며칠분의 화목을 하루에 다 준비하곤 하였다 한다.
횃불싸움은 정월 보름에 마을대항으로 하는 상무적 놀이이다. 홰는 따로 만들지 않고 낡은 마당비에 기름을 부어 만들고, 해가 지면 홰에 불을 붙여 산정에서 망월을 하다가 옆마을과 횃불싸움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상대편을 말로 헐뜯다가 나중에는 횃불을 들고 진격하여 밀리는 편이 지게 된다.
또한, 화천에는 12개 마을에 농악놀이가 있어 황소를 상으로 걸고 펼쳐진 농악경연대회가 열렸다. 현재는 사내면 용담리 · 사창리 · 광덕리의 3개 마을에서만 하고 있다.
마을 단위로 산신당이나 서낭당이 있어 매년 정월에 산신제나 서낭제를 지냈다고 한다. 6 · 25전쟁을 전후하여 중단되어 현재 동제를 지내는 곳은 거의 없다. 다만 용화축전행사의 하나로 용화산신제가 재현되어 거행되고 있다.
이 고장에는 「미륵바위전설」 · 「처녀고개전설」 등 지명에 얽힌 이야기가 다수 전해온다.
미륵바위는 화천읍 대리리 마을 어귀에 있는 바위이다. 옛날 과거를 보려고 이 앞을 지나던 선비가 바위에 음식을 공양했더니, 갑자기 초립동이 아이가 나타나 서울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선비는 초립동이와 같이 주막에서 기거하다가 그가 시키는 대로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화천현감이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초립동이는 미륵바위의 현신이었다 한다.
화천의 처녀고개 역시 과거에 관계된 유래담이 전해온다. 언젠가 장래를 약속한 처녀 · 총각이 이 고개 밑에 살았는데, 총각이 과거를 보러 서울로 떠나는 바람에 둘은 이별을 하게 되었다. 처녀는 고개에 있는 나무에 버선을 지어 걸어놓고 총각이 올 때를 기다렸으나, 총각은 오지 않고 세월이 흘러 버선은 낡아만 갔다. 처녀는 버선을 새것으로 바꾸려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그만 떨어져 죽었다. 바로 그 날 총각이 과거에 급제한 뒤 이 고개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약수로 널리 알려진 「냉정터전설」은 그 유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상서면 구운리의 「비래암(飛來岩)전설」은 바위가 외지에서 날아왔다는 것이다. 「안창마을전설」은 유랑민 30여 호가 처음 사내면 사창리에 터전을 잡고 생활했으나 마을 앞산의 호랑이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다가 중의 인도로 마을을 옮겨 호환도 없어지고 군내에서 가장 부자마을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 고장에 전하는 대표적 지명전설이다.
이 밖에도 남자에 대한 그리운 정을 이루지 못한 채 죽어가서 그 무덤에 보랏빛 꽃을 해마다 피게 하였다는 「도라지꽃전설」, 상주가 소를 타고 묘자리를 구하려다가 소가 누운 자리에서 명당을 얻었다는 「우득소(牛得所)이야기」, 머슴이 부지런히 일을 하여 진사가 되고 화천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는 「머슴 살던 김진사이야기」 등이 전한다.
이 고장에 구전되는 민요는 노동요가 중심이 된다. 노동요 중에는 「논매기소리」가 우세한데, 초 벌 논매기에는 상사디어계인 「뎅이소리」를 부르고 두벌 논매기에는 「미나리」를 부른다.
“(앞) 이논자리 얼른매고 장구배미로 넘어간다/(뒤) 얼널널 상사디야…….”라는 「뎅이소리」는 춘천지방의 「상사소리」와 같이 느린 중중모리 장단에 맞다. 앞소리꾼이 한 장단을 메기면 일꾼들이 모두 한 장단 길이로 받아 메나리목으로 흥겹게 부른다.
“이실동아침 만났던동무 해질골때 이별일세/오늘낮에 이별하고 내일아침에 다시보세…….”와 같이 자유리듬으로 사설내용에 따라 장 · 절 구분을 하는 「미나리」는 혼자 길게 빼어 불러 처량하게 들리기도 한다.
밭을 갈 때 부르는 소모는 노래로 한 마리 소를 몰면서 “이랴 이랴”와 같은 소 모는 소리 사이에 자유리듬으로 단순한 사설을 읊조리듯 삽입하는 「홀리소리」가 있다.
“무슨팔자 기박해서/극지랭이 짊어지고/이산중에 들어와서/곧은멍에 걸어놓고/소두마리 매어놓고/밭갈이를 하는거냐…….”와 같이 신세를 한탄하는 사설을 부르는 것도 있다.
집을 지을 때 터 다지면서 부르는 노래도 있는데 “(앞) 에 어라 지경이야/(뒤) 에 어라 지경이야//(앞) 이집진지 삼년만에/(뒤) 에 어라 지경이야//(앞) 아들나면 효자를 낳고/(뒤) 에 어라 지경이야//딸을나면 열녀를낳고…….”와 같이 느린 중중모리 장단으로 한 장단씩 메기고 받는 선후창으로 부른다.
이 밖에도 「흥타령」 · 「새타령」 · 「양산도」 · 「산타령」 등의 타령류 노래가 불린다.
이 군은 내륙산간이기 때문에 농경지의 규모가 적어 소규모의 하곡평야(河谷平野)와 하성단구 및 산록 완사면에 분포하는 정도이다. 산업구조를 보면 1차산업이 43%, 2차산업이 3%인데 비해 서비스 업종인 3차산업이 54%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휴전선에 접하고 있어 가족의 면회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된다.
2015년 현재 경지면적 3,330㏊ 중 논이 1,338㏊, 밭이 1,942㏊로 밭이 약간 많다. 농가가구는 2,277가구, 농가인구 6,251명으로 감소 추세에 있다. 그러나 농기계의 보급은 급증되고 있는 추세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옥수수 · 콩 · 감자 등이며, 산채류와 소득다변화 계획에 의거 추진하고 있는 방울토마토 · 느타리버섯 · 평화가시오이 · 달래 · 두릅 · 화훼 등의 생산단지가 유명하다. 이들 특산물은 청정지역에서 유기농법으로 재배되어 상품성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군내의 자연생초지에서 한우의 사육이 각 읍 · 면에서 사육된다. 젖소는 하남면 · 사내면, 사슴은 하남면 · 화천읍 · 상서면, 산양은 간동면 · 사내면 · 상서면, 양계는 하남면 · 화원읍 · 상서면 등에서 활발하다. 양봉은 각 읍 · 면에서 고르게 행해진다. 화천댐의 상류인 파로호에서는 내수면 어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임야면적 8만 49㏊ 중 국유림은 4만 9,074㏊, 공유림은 7,605㏊, 사유림은 2만 3,370㏊이다. 임상별로는 입목지 7만 9,732㏊ 중 침엽수가 1만 9,038㏊, 활엽수가 4만 95㏊, 혼효림이 2만 559㏊이다. 임산물로는 종실류가 중심인데 밤 · 도토리 · 잣 · 은행 등과 송이 · 느타리 · 표고 등의 버섯류 및 약초 등이 있다.
상서면 부촌리에서 규석과 고령토가 개발되었고, 구만리에는 수로식인 화천발전소가 있는데 시설용량은 10만 8000㎾이다. 한편, 하남면 위천리에는 원천농공단지가 조성되어 14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상업활동은 예로부터 정기시장(5일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동국문헌비고』에 의하면, 낭천현(지금의 화천)에는 읍장(읍장)이 3 · 8일에 1개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장마저도 당시(18세기)에는 폐지되었으며, 폐지된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고 한다.
구체적인 기록에 의하면, 1912년대에 읍내장(상리)이 2 · 7일, 상서면 산양리에 산양리장이 3 · 8일, 인마리장(人馬里場)이 1 · 6일에 개설되는 등 3개의 장이 개설되었었다. 1926년대에는 읍내장과 간동면 방천리의 방천리장(芳川里場)이 1 · 6일에 개설되었다.
1938년대에는 앞의 장외에 산양리장이 3 · 8일에 개설되는 등 3개로 증설되었다. 1963년대에는 읍내장 1개만이 2 · 7일에 상설로 개설되었고, 1976년대에는 읍내장이 3 · 8일, 사내면 사창장(史倉場)이 5 · 10일에 개설되었다. 2015년 현재 등록시장 1곳이 있다.
교통은 산간내륙지방이지만 화천읍을 중심으로 국도와 지방도 및 군도 등이 연결되고 있어 편리한 편이다. 즉 5번 국도가 상서면에서 화천읍∼춘천으로 이어지고, 56번 국도가 철원에서 상서 · 사내 · 사북면을 지나 춘천∼홍천으로 이어진다. 46번 국도가 춘천∼간동∼양구로 이어져 있다.
지방도로는 407번이 춘천∼화천읍, 460번이 화천∼평화의 댐∼양구, 461번이 화천∼양구 등을 연결한다. 시 · 군도는 15개 노선이 있어 각 읍 · 면지역과의 교통이 이루어진다.
이들 노선을 보면 1번 당림∼광덕, 2번 다목∼하리, 3번 신당∼사창, 4번 유천∼방천, 5번 원천∼파포, 6번 신읍∼동촌, 7번 풍산∼주파, 8번 망상∼신대, 9번 삼하∼용암, 10번 용담∼계성, 11번 명월∼다목, 12번 광덕∼사창, 13번 신읍∼호계, 14번 눌언∼논미, 15번 중리∼풍산 등이 있다.
주요 관광지는 1938년 화천댐으로 조성된 파로호(破虜湖)와 그 주위의 월명산 · 용홧 · 미륵바위 · 통영사 약수터 · 팔랑폭포 · 직연폭포 · 평화의 댐 등이다.
파로호는 호수와 그 주변의 굽은 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울창한 수목이 계절마다 다른 경관을 보여 절경을 이룬다. 호수에는 70여 종의 담수어가 서식하여 낚시터로도 널리 알려져 있고, 관광유람선이 선회하고 있다. 파로호란 이름은 6 · 25전쟁 당시 해병대 1개 연대 장병들이 중공군 오랑캐 3만여 명을 화천저수지에 수장시키는 큰 전과를 올림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이 붙인 이름이다.
서울에서 오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서울 · 광릉내 · 포천일동 · 포천이동 · 사내면 · 지촌 · 화천(파로호)의 경로를 택한다. 통영사 약수터는 화천읍에서 서쪽으로 10㎞ 지점에 있는 미륵고개를 지나, 이 곳에서 상서면 노동리 쪽으로 산길을 따라 15분 간 걸으면 약수터에 닿는다. 이 곳에서 한 달간 휴양하면서 약수를 마시면 속병 · 피부병 · 풍병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이 지방 사람들은 매년 유월 유두날에 여기 와서 약수에 몸을 씻으면 피부병이 낫고, 피부가 아름다워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춘천 · 철원 · 양구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 약수는 물이 아주 찰 뿐만 아니라 가뭄에도 샘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평화의 댐은 북한이 건설한 금강산댐에 대응하기 위해 1987년 2월화천읍의 북한강 상류에 착공되어 1988년 5월에 1차로 완공되고, 2002년부터 댐 높이를 높여 2005년 10월 최종 완공되었다. 관광객은 여름철 8월에 제일 많다. 서울에서는 청평 · 가평 · 춘천을 거쳐 화천읍의 평화의 댐에 도착할 수 있다.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291.31㎢, 인구는 3,465세대에 8,399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아리이다. 본래 화천(낭천)군의 소재지이므로 낭천현 현내면(縣內面)이라 불렸다. 1895년 5월 26일화천군으로 바뀌면서 군내면이 되어 대리 · 신읍 · 풍산 · 수동(水洞) 등 6개 이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면(東面)의 방천리(芳川里) 일부가 편입되어 상리 · 중리 · 하리 · 아리 · 신읍 등 9개 리로 개편되었다. 1937년 화천저수지가 건설되면서 간동면의 동촌 · 태산(太山) 2개 리가 편입되었다. 1945년 8 · 15광복 후 북한에 속해 있다가 1954년 수복되었으며, 197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중앙부에 있는 일산과 재안산이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여 산지가 많고 평지는 극히 적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읍의 동쪽을 남류하여 파로호에 흘러들고, 화천댐의 건설로 형성된 파로호는 남쪽의 간동면과의 경계를 이룬다. 남서쪽 마현천(馬峴川) 유역에 형성된 약간의 평야에 주로 취락과 농경지가 분포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콩 · 옥수수 외에 사과 · 배 · 약초재배 및 양계도 하며, 복숭아 재배와 사슴 사육과 표고버섯이 많이 난다. 70%의 인구가 군청 소재지인 아리를 비롯한 상리 · 중리 · 하리에 집중되어 있다. 그 밖의 지역은 인구가 희박하다. 상업활동은 아리에 있는 상설시장과 정기시장인 우시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교통은 5번 국도가 읍내에서 북서쪽으로 김화, 남쪽으로 춘천과 연결된다. 460번 지방도가 평화의 댐을 지나 양구로 이어져 관광도로의 구실을 한다. 2번 군도가 다목∼하리, 6번 군도가 신읍∼동촌, 7번 군도가 풍산∼주파, 13번 군도가 신읍∼호계, 15번 군도가 중리∼풍산을 연결한다.
서부의 여러 면지역과는 편리하나 동부지역은 지형적인 관계로 도로의 개설이 어려워 교통이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하리에 화천향교와 생산성이 있다. 관광지로는 파로호 주변의 절경과 낚시터가 유명하다. 특히 평화의 댐은 양구의 제4땅굴과 연계된 안보관광지로서 찾는 사람이 많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아(衙) · 상(上) · 중(中) · 하(下) · 신읍(新邑) · 풍산(豊山) · 대리(大利) · 동촌(東村) 등 8개 리가 있다.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7.97㎢, 인구는 1,149세대에 2,49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유촌리이다. 본래 화천군의 동쪽이 되므로 동면이라 하여 동촌 · 태산 · 본산(本山) · 방천의 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간척면(看尺面)의 오음사(梧音寺) · 도송동(都宋洞) · 유촌 · 상간척(上看尺)의 4개 리와 군내면의 대리리가 병합되어 간동면이라 개칭되었고 동촌 · · 태산 · 방천 · 오음 등 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41년 화천댐 건설에 의한 수몰로 면 사무소가 구만리에서 유촌리로 이전되었다. 구만리에는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45년 8 · 15광복 후 38도선 이북에 위치하여 북한에 속해 있다가 1954년 수복되었다.
북쪽 경계에는 파로호가 있고, 동쪽에 사명산, 남쪽에 죽엽산(859m) · 오봉산, 남서쪽에 용화산 등이 있어 대부분이 산간지역이다. 중앙부의 간척리 · 오음리 · 용호리 일대에 침식에 의한 대규모의 산록 관사면이 발달하여 경지와 취락이 밀집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콩 · 옥수수 등이고 특히, 한우 · 돼지의 사육이 활발하며, 산양사육은 군내 1위이다. 파로호 주변에서는 내수면 어업도 행해지고 있다.
교통은 46번 국도가 면의 남부를 지나면서 춘천∼양구를 연결한다. 461번 지방도가 오음∼하리를 이어준다. 4번 군도가 유촌∼방천으로 통하면서 양구군과 연결되는 등 종전보다 편리해졌다. 문화유적은 유촌리에 성불사지석불입상 · 성불사지석장승이 있고, 용화산에 맥국성지 · 용흥사사지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유촌(楡村) · 용호(龍湖) · 간척(看尺) · 오음(梧陰) · 방천(芳川) · 도송(都宋) · 구만(九萬) 등 7개 리가 있다.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51.18㎢, 인구는 2,443세대에 5,74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사창리이다. 본래 사탄향(史呑鄕)의 소재지이므로 시룬 또는 실운에서, 변하여 곡운으로 개명되었다. 조선시대에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에 딸린 사탄내면(史呑內面)이 되어 수밀(藪密)과 현내(縣內)를 관할하다가 1895년사내면이 되어 신촌(新村) · 영당(影堂) · 면대(面垈) 등 12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 영평군(永坪郡) 이동면(二東面) 도평리(桃坪里) 일부가 편입되어 용담 · 삼일 · 사창 · 명월의 5개 리를 관할하였다. 1945년 8 · 15광복 후 북위 38도선 이북으로 북한에 속했다가 1954년 수복되면서 춘천군에서 화천군으로 이관되었다. 면 소재지도 광덕리에서 사창리로 이전되었다.
남쪽에는 화악산, 서쪽에는 광덕산 · 백운산, 북쪽에는 복주산(伏主山, 1,152m) 등 높은 산이 많다. 각 산지에서 발원한 수계(水系)는 사창리에서 합쳐져 용담천(龍潭川)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 춘천시 사북면에서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내륙 산간지역이므로 경지는 적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 · 콩이다. 그 밖에 양돈이 활발하며 사내 우시장(정기시장)이 열린다.
교통은 56번 국도가 김화∼사항∼화천∼양양을 연결한다. 1번 군도가 당림∼광덕을 연결하여 가평읍과 통한다. 3번 군도가 사창∼신당, 10번 군도가 용담∼하남 계성을, 11번 군도가 명월∼상서 다목, 12번 군도가 사창∼광덕을 지나 포천시 이동의 47번 국도와 연결되어 종전보다 편리해졌다. 문화유적은 삼일리에 화음동정사지, 용담리에 서원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사창(史倉) · 광덕(廣德) · 용담(龍潭) · 명월(明月) · 삼일(三逸) 등 5개 리가 있다.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20.13㎢, 인구는 1,848세대에 4,33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파포리이다. 본래 화천군의 서쪽에 있으므로 서면(西面)이라 하여 토고미(土古味) · 구운 · 파포 · 봉오 등 12개 리를 관할하였다. 조선 순조 때 상 · 하로 갈라져 아래쪽에 있는 논미 · 계성 · 원천 · 서오지의 4개 리는 하서면(下西面) 그 나머지는 모두 상서면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풍(新豊) · 구운 · 파포 · 노동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56년에 구운리가 갈라져 장촌(長村)노동리가 갈라져 부촌(富村)신풍리가 갈라져 신대(新大)의 3개 리가 증설되었다. 1945년 8 · 15광복 후 북위 38도선 이북에 위치하여 북한에 속해 있다가 1954년 수복되면서 면소재지가 노동리에서 현재의 파포리로 이전되었다.
서쪽에 대성산, 남쪽에 백적산(白積山, 884m)북쪽에 적근산 등이 솟아 있어 면 전체가 산간지대를 이룬다. 적근산 부근에서 발원한 마현천(馬峴川)은 남동류하면서 마현리 · 산양리 · 부촌리 · 노동리를 지나 화천읍으로 흘러 든다. 대성산 부근에서 발원한 봉오천(峰吾川)은 동남류하면서 봉오리에 이르러 수피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다목리를 지나 동류하여 온 수계와 합류한다. 그리고 파포리 · 장촌리 · 신대리 · 신풍리를 지나 하천읍 상리에서 마현천과 합류하여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경지와 취락은 주로 이들 두 하천을 따라 분포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콩 · 옥수수 등이고, 젖소 · 한우 사육과 양봉이 활발하다. 특히 봉오리와 다목리는 ‘재래봉 보호구역’으로 보호되고 있다.
교통은 5번 국도가 마현천 계곡을 따라 말고개를 넘어 김화와 화천읍으로 연결된다. 56번 국도가 면의 서쪽을 남북으로 통과하며 수피령을 넘어 김화와 사내면을 지나 춘천과 연결된다.
2번 군도가 다목∼하리, 5번 군도가 하포∼원천, 7번 군도가 풍산∼산양, 8번 군도가 망상∼신대, 11번 군도가 명월∼다목, 13번 군도가 산양∼신읍을 연결하는 등 6개 노선이 있어 주변의 여러 지역과 이어져 있어 종전보다 편리해졌다. 문화유적은 산양리에 대성산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 교(분교 1개 교)중학교 1개 교가 있다. 파포(巴浦) · 신풍(新豊) · 신대(新大) · 구운(九雲) · 장촌(長村) · 노동(蘆洞) · 부촌(富村) · 산양(山陽) · 봉오(峰吾) · 다목(多木) · 마현(馬峴) 등 11개 리가 있다.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118.49㎢, 인구는 859세대에 2,13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원천리이다. 본래 화천군 서면(西面)의 아래쪽이 되므로 하서면이 되어 논미 · 원천 · 계성 · 서오지의 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면(南面)의 위라 · 용암 · 거례의 3개 리가 병합되어, 하남면이 되어 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56년에 논미리가 갈라져 안평(安坪)으로 용암리가 갈라져 삼화(三和)의 2개 리가 증설되어 9개 리가 되었다. 1945년 8 · 15광복 후 북위 38도선 이북에 위치하여 북한에 속해 있다가 1954년에 수복되었다.
서쪽에 두류산 · 장군산(將軍山, 847m)남쪽에는 토보산(589m) · 용화산(用華山, 878m)북쪽에는 백적산 등이 있다. 북한강에 의해 면이 양분되어 있고, 춘천댐의 건설로 형성된 춘천호에 의해 많은 농경지가 수몰되었다. 춘천호 연안과 산간계곡에 약간의 경지가 있을 뿐이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콩 · 옥수수이다. 그 밖에 채소 · 양잠 · 사슴사육 · 양계 등이 활발하다. 특산물로는 고사리 · 더덕 · 송이버섯 등 산나물이 많이 나는데, 특히 용화산에서 송이버섯이 많이 난다. 젖소 · 사슴의 사육과 양계는 군내 1위이고, 양계는 50%나 차지한다. 그리고 원천리에 원천농공단지가 있다.
교통은 5번 국도가 북한강 서안을 따라 발달하여 화천∼춘천과 연결되고 있다. 한편, 군도는 5번이 원천∼파포, 9번이 삼화∼용암, 10번이 용담∼계성, 14번이 눌언∼논미를 연결하고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계성리에 석등 · 사지, 위라리에 칠층석탑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분교 1개 교)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원천(原川) · 서오지(鋤吾芝) · 논미(論味) · 안평(安坪) · 계성(啓星) · 위라(位羅) · 용암(龍巖) · 삼화(三和) · 거례(居禮) 등 9개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