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공학 ()

과학기술
개념
각종 화학장치의 설계 · 관리 · 운용 등에 필요한 기술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정의
각종 화학장치의 설계 · 관리 · 운용 등에 필요한 기술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내용

줄여서 화공학(化工學)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많은 화학기술이 주로 경험에 입각한 창의에 의하여 생겨나고 이용되어 왔으나, 자연과학으로서의 화학이라는 분야가 새로 생겨나 체계화되고 발전됨에 따라 수많은 새로운 화학기술들이 개발되면서 근대적 화학공업이 출현하고 발전하게 되었다.

화학의 발전으로 새로운 화학제품과 제조방법의 기본이 되는 새 화학반응물이 발견되었으나, 이것을 공업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기술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화학이나 화학자의 힘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화학기술자라는 새 직종과 화학공학이라는 새 공학체계의 확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토목·건축·기계 같은 공학들이 19세기 전반까지 유럽에서 태어나고 체계화되어간 데에 비하면 화학공학의 탄생은 매우 늦게 이루어졌다.

화학공학의 체계확립은 1880년대에 영국에서 시도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 미국에서 첫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908년 창립된 미국화학기술자협회가 주동이 되고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을 본거지로 하여 1915년에 단위조작의 개념이 명확히 규정되었다. 즉, 화학공업에서의 여러 제조공정은 기본적인 몇몇의 물리적인 단위조작(증발, 건조, 증류 등)의 결합이므로 이와 같은 각 조작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고 연구, 발전시키는 것을 화학공학의 기본으로 정의하였다.

단위조작을 바탕으로 하는 화학공학체계는 미국에서 큰 성과를 거두어 화학공업과 기술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미국대학의 모든 화학기술교육은 화학공학과로서 이 체제에 따르게 되었다. 학문으로서의 단위조작도 보다 발전된 체계로 바뀌어갔다. 1930년대에는 제조공정들을 화학적인 공통요소별로 정리하여 단위반응공정으로 체계화하여 물리적인 단위조작과 양립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큰 반향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학반응의 공학적 해석을 통한 합리적인 반응장치 설계의 이론적인 기반 구축을 목적으로 하는 반응공학(反應工學)이 화학공학의 한 분야로 추가되었다. 1960년대에는 화학공업에서 장치·공정·공장들을 전체적으로 최적하게 설계·운전해야 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컴퓨터를 이용하여 공정의 자동화 및 자동제어를 구현하는 공정제어 기술 또는 시스템공학 기술이 화학공학에 추가되었다.

유럽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도 화학기술의 개발과 발전에 있어 화학의 중요성을 강하게 인식하면서 교육과 연구에서 공업화학을 주로 하는 경향을 갖고 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국식 화학공학의 도입이 늘어났으나 대학에 공업화학과가 없는 미국식과는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일본도 1930년대부터 미국의 화학공학을 도입하기 시작하였으나 공과대학에서의 교육과 연구는 화학공학과와 공업화학과로 이원화되어 있다.

도입 및 전개

우리 나라에서의 근대적 화학기술의 교육이나 생산활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학문으로서의 화학공학을 ‘화학기술의 교육과 연구활동에 직결되고 공업생산과 연관되는 것’이라 할 때 그 자주적인 학문의 확립과 발전은 1945년 이후라 하겠다. 20세기 초에 관(官)이나 외국인들에 의해 몇몇 초보적 화학제품의 생산이 시작되었고, 소규모의 민족자본에 의한 요업·섬유·고무 공장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본격적인 기술발전이나 고도기술의 수용은 불가능하였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이 주로 함경도·평안도 지방에 비료·펄프와 종이, 인조견·석탄화학공업, 시멘트·제철과 경금속공업 등에 있어 근대적 규모의 공장들을 건설, 운영하였으나 그 기술분야에 한국인들은 전혀 참여시키지 않았다.

한편, 교육분야에서는 1915년에 설립된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응용화학과가 설치되면서 화학기술의 고등교육이 시작되었으며, 1941년에는 경성제국대학에 신설된 이공학부에 응용화학과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들 관립학교에서는 한국인을 정원의 4분의 1 이하로 제한하여 한국인 졸업생 수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졸업생 취업도 차별 제한하여 기술자 본연의 길을 걸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들 기관에서의 학술활동은 응용화학에 편중되었으며 별로 두드러진 것이 없었다. 1912년에 중앙시험소가 설립되면서 화학기술에 관계되는 시험과 연구가 시작되었으나 국내자원의 조사와 간단한 응용연구에 국한되었다.

광복과 함께 1946년부터 미국식 교육제도가 채택되고 경성대학과 관립전문학교들이 통합되어 국립서울대학교가 생김에 따라 공과대학에 화학공학과가 발족되었다.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는 국내 최초의, 그리고 1940년대 유일의 화학공학과로서 단위조작 강좌가 개설되었으나, 교육과 연구는 공업화학을 탈피하지 못하였다. 이외에 중앙시험소는 국립공업연구소로 개편되어 무기·유기·요업·식품·염직 등 주로 공업화학 부문의 시험과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자연과학 계통의 학문발전에 있어서 학회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1946년에는 조선화학회(정부수립 후 대한화학회로 개칭)가 창립되었고, 화학과 화학공학을 비롯한 모든 응용화학 분야를 포함시켜 비교적 활발한 연구발표회를 개최하였으며, ≪대한화학회지≫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에 들어와 휴전 후 국립과 사립의 대학 수가 늘어나면서 1954년에는 화학공학과의 수가 8개에 이르렀다. 1950년대 후반에 들어와 외국원조가 학술과 교육부문에도 이르게 되어 화학공학과의 체제도 미국식을 지향하게 되었으며, 많은 학생들이 해외로 유학을 떠나고, 근대적 화학공장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말까지의 활동은 주로 공업화학으로서 국내 원료나 자원 이용이 두드러졌으며, 요업관계·볏짚펄프·섬유소·황화염료·국산광물이용과 간단한 합성 등에 관한 논문이 ≪대한화학회지≫에 수록되었다.

1962년부터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면서 많은 화학공장들이 건설되고 화학제품의 생산량이 증가되었으며, 이에 따라 화학기술자의 수요가 늘어나고 외국의 근대적 기술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외국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하고 들어오기 시작한 학계인사들이 대학에 들어오면서 화학공학과의 교육과 연구활동도 활발해졌다.

일부에서는 화학공학과 공업화학의 두 전공을 두는 경우도 있었으나, 단위조작·반응공학·제어·설계 등 넓은 범위의 강좌가 화학공학과 내에 개설되었다. 1969년도에는 전국대학의 화학공학과의 수가 26개에 이르고, 모집정원도 1,000명을 넘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에는 대학의 팽창에 따라 요업공학과(현재의 무기재료 또는 세라믹스공학과)·고분자공학과·공업화학과가 분리, 설치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1959년도와 1966년도에 각각 발족한 원자력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의 화학공학 부문의 연구활동도 활발해졌다. 대한화학회도 1961년부터 운영체제를 바꾸고 활기를 되찾았으며, 1962년에는 한국화학공학회가 창립되어 1963년도부터 학회지 ≪화학공학≫을 발간하여 연구논문 수록과 아울러 화학공학과 기술발전의 구심체이며 매개체로서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1960년대는 학술활동의 기반이 구축되면서 매우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유동(流動), 전열(電熱)·혼합을 비롯하여 추출·여과·건조·흡착 등 거의 모든 단위조작 각 분야의 연구논문이 발표되었다. 방사성동위원소를 쓰는 비료공장의 반응탑의 특성 연구, 평형에 관한 공학적 자료 연구, 반응공학적 연구와 촉매에 관한 공학적 연구들도 나타났다. 특히, 유동화와 유동층의 문제들이 여러 각도에서 다루어진 것이 두드러진다. 국산무연탄의 반응성·가스화·연소·화학적 산화들이 연구되고, 국산광물자원의 화학적 이용연구와 고분자의 합성, 열분해 연구, 방사성페기물의 처리연구도 발표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 대학의 화학공학과는 선진국형의 교과과정을 확립하고 시설확충과 대학원의 활성화와 함께 활발한 학술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73년에는 대학원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과학원이 학생을 모집하게 되어 화학공학에 있어 학술활동진흥의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비료·시멘트·정유(精油)·합성섬유·PVC 등의 생산에 이어 울산의 석유화학공업단지의 가동과 여천지구의 제2석유화학공업단지의 건설 등으로 많은 새로운 외국기술이 도입되어 화학공업의 생산기술 수준은 크게 향상되었다. 또한, 공정개선 및 공장건설 등에 관련한 엔지니어링회사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으며, 화학공정과 공장의 설계에 관한 기술능력도 신장되어갔다.

1966년에는 국내 최초의 현대적 종합 공업기술 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되어 산업계와의 용역 연구활동을 활발히 진행시킴에 따라 화학기술의 실험실적 연구결과가 공정설계와 공장건설을 통해 생산으로 이어지게 됨으로써 화학기술의 개발수준도 점차 향상되어갔다. 1976년에는 화학공업기술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한국화학연구소도 설립되어 연구활동을 시작하였다.

1970년대의 화학공학은 그 기반을 더욱 굳히면서 분야를 확대하고 연구를 깊이 있게 실시하는 방향에서 화학기술과의 상호의존과 보완관계를 긴밀히 하고, 나아가 이의 선도를 기하면서 전개되어갔다. 또한, 활발한 국제적 교류를 통해 선진기술을 습득함에 따라 학문적·산업적 능력과 수준이 두드러지게 향상 되어갔다.

1971년 가을에는 대한화학회 25주년 기념행사로서 ‘석유화학공업’과 ‘국가발전에 있어서의 화학과 화학기술의 역할’이라는 2개 주제를 중심으로 국제학술 심포지엄이 개최되었으며, 1972년 10월에는 한국화학공학회 10주년 기념행사로서 국제화학공학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학의 학과분화에 따라 학회도 분화되어 오래 전에 창립된 요업학회가 1964년도부터 회지를 발간한 데 이어 1976년에 한국고분자학회가 창립되어 1977년부터 회지 ≪폴리머≫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부터의 학술활동은 추출·흡착·증류·분쇄, 그리고 충전탑·기포탑·열전도도·상평형문제 등의 통상적 단위조작 연구 이외에 냉동건조·투석·역삼투압법·이온교환 같은 새로운 분리조작 연구가 추가되었다. 또한, 공정최적화·시뮬레이션, 그리고 컴퓨터이용 연구와 레올로지(rheology) 연구도 개척되었다.

고상반응·촉매반응 등의 연구가 활발해졌고, 특히 제올라이트(zeolite)에 관하여는 그 합성·분리기능·촉매기능들이 학술적 및 공학적으로 연구되어가는 것이 돋보였다. 국산광물자원 이용과 그 밖의 여러 화학제품생산에 관한 화학반응들의 화학공학적 연구가 그 범위를 확대해가면서 폭넓게 계속되었다. 고분자의 합성·반응·물성 및 이용연구들이 또한 매우 활발하여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환경오염과 관계되는 환경화학공학 분야의 연구는 1970년대에는 더욱 활발하여지고, 대기오염·폐수처리에 관한 연구들이 증가하였으며, 에너지 문제에 있어서의 화학공학적 관심과 기여도 매우 커져갔다. 1970년대 말부터 의공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여지면서 인공신장과 같은 인공장기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기에 이르렀다.

1983년 5월에는 한국화학공학회 주관하에 제 3차 아시아·태평양화학공학회의 (PACHEC, 1983)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으며, 우리 나라를 포함한 16개국에서 1,000명 이상이 참석하여 30개 가까운 여러 분과에서 263편의 연구논문이 발표되는 성황을 이루었다. 국내에서의 국제 학술회의 개최는 꾸준히 계속되고 있으며, 1999년 8월에는 서울에서 제8회 아시아·태평양 화학공학회의(The 8th APCChE, Asian Pacific Confederation of Chemical Engineeing)가 ‘Challenges Facing Chemical Engineering in the 21st Century’라는 제목 하에 개최되었으며, 세계 각국에서 1000명 이상의 연구자들이 참석하여 25개 연구분과에서 527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국내 화학공학의 학문적인 수준이 크게 향상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그 동안 소홀히 하였던 국제 학술지에 게재되는 논문수가 매년 크게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연구수준의 향상은 연구중심 대학을 표방한 한국과학원과 포항공과대학 등이 설립되어 신진 교수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분야에서의 학문적 연구가 심도 있게 진행된 결과이다. 이러한 연구경향은 이제 전 대학에 확산되어 연구논문에 의해 교수들의 업적이 평가되고 있으며, 많은 대학에서는 국제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을 박사학위 수여의 필수요건으로 정하고 있다.

전 망

1996년 현재, 국내의 공과대학에는 55개의 화학공학과가 개설되어 있으며, 화학공학 관련 학과로는 14개의 공업화학과, 14개의 고분자공학과, 38개의 환경공학과 등이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석유화학 관련산업의 호황으로 인해 화학공학과는 공과대학 내에서 매우 높은 인기를 구가하였으나, 1980년대 이후 석유화학산업의 정체, 화공분야 중 고분자 공학·환경공학·생물공학 분야의 독립, 새로운 학문분야의 개척 부진 등으로 인해 화학공학과의 인기가 서서히 낮아지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상황이 더욱 급격히 진행되어 화학공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화학공학의 위기라는 말이 회자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1998년 이후에는 여러 대학에서 화학공학과와 주변의 관련학과들을 합치는 다학제적인 통합방식을 통해 새로운 학문분야를 수혈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는 화학공학과와 공업화학과가 합쳐진 응용화학부가 개설되었으며, 연세대학교에는 화학공학생명공학부, 경희대학교는 환경응용화학부, 인하대학교는 화공고분자생물공학부, 성균관대학교는 화학,고분자,섬유공학부, 홍익대학교는 재료화학공학부가 개설되었다. 이러한 학문분야에서의 변화는 산업발전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국내의 경우 특히, 화학공학 분야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화학공학의 미래에 대한 위기의식이 폭넓게 퍼져 있는 상태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화학공학을 단위조작과 석유화학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관점에서 조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인력 수급면에서 취업대상 산업과 대학학과 간에는 매우 독점적인 수급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산업구조가 변하면서 근래에는 이와 같은 인력수급의 형태도 크게 바뀌고 있다. 즉, 화학공학과 졸업생의 상당수가 이미 전자나 기계공업 회사에 취직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이러한 추세가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이것은 오늘날 산업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의 내용이 매우 다양해짐에 따라 다학제적인 지식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NCTP(National Critical Technologies Panel)에서는 21세기에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기술로 소재와 생산, 정보와 통신, 생물공학과 생명공학, 육·해·공 교통, 에너지와 환경 등 다섯 가지를 선정하였다. 미국의 CCT(Committee on Critical Technologies)는 화학과 화학공학 연구가 상기 핵심기술의 거의 전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필수불가결의 요소라고 결론짓고 있다.

화학공학 분야가 가장 발달한 미국의 경우 아직도 화학공학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 내 수 천 가지의 직종 가운데 평균소득이 가장 높은 직업이 화공엔지니어인 점도 화학공학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화학공학은 많은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듯이 화학공업 사업에만 필요한 학문이 아니며, 화학공학 교과과정에서 가르치는 반응·분리·결정화·혼합·건조·유체역학·열역학·전달현상·추출·흡수·흡착·공정제어 등등의 학문은 화학공업은 물론, 섬유·반도체·철강·자동차·조선·우주·항공·에너지·환경·엔지니어링·청정기술·정밀화학 등 수없이 많은 산업분야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화학공학 연구자들은 화학공학 특유의 학문적 다양성과 적응성을 창조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할 때 화학공학은 현재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산업의 전 분야에서 폭넓게 활용될 수 있는 필수학문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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