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자직(子直). 황신구(黃藎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황흠(黃欽)이고, 아버지는 황서하(黃瑞河)이며, 어머니는 박태연(朴泰延)의 딸이다.
1718년(숙종 4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1년 설서가 되었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1725년 지사 민진원(閔鎭遠) 등의 주청으로 다시 서용되어 수찬·지평·부교리 등을 거쳐, 1726년 교리·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727년 겸사서·겸문학·이조좌랑을 역임하면서 언론의 개방과 주강(晝講)에 대신들을 참여시킬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그 뒤 응교·사간을 거쳐, 1734년 진주사행(陳奏使行)의 서장관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와 이듬해 의주부윤이 되었다.
그 뒤 광주부윤(廣州府尹)·겸필선·집의·보덕·강원도관찰사·부제학을 거쳐, 1748년 이조참의·대사헌·지의금부사·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1750년 동지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호조참판이 되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필의재유고(畢依齋遺稿)』가 있으며, 이 안에 두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다녀온 견문을 기록한 기행문집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과 『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