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에 대한 한국 국민의 기백과 의지를 전세계에 일깨워 주고, 휴전이 성립된 이후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경우 이에 대처할 수 있는 미국의 보장을 받기 위한 목적을 달성한 범국민적인 운동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전쟁의 확전을 우려한 유엔과 자유진영이 휴전을 모색하게 되면서부터 통일의 가망성은 희박해졌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미국은 1951년 5월 17일에 한국전쟁의 목적을 정치 목표와 군사 목표로 분리하여 먼저 군사 목표부터 추구함으로써 휴전협상을 통하여 쌍방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뒤를 이어 6월 1일에는 유엔이 ‘38도선 부근에서 휴전한다는 것은 유엔군의 참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한국전쟁의 휴전협상은 사실상 유엔 회원국가들의 동의를 얻은 셈이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보도된 얼마 뒤인 6월 10일 당시의 임시 수도 부산에서는 수만의 군중이 궐기한 휴전반대국민대회가 개최되었으며, 이것이 휴전반대대회의 효시였다. 그 이후 한국 국민의 휴전반대대회는 휴전회담이 정체상태로 빠져들게 되면 잠잠해지고, 회담이 재개되면 궐기대회가 개최되는 가운데, 정부와 국회가 휴전반대성명을 발표하는 범국민적인 정치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렇듯 휴전을 극력 반대하는 이유는 국토통일에 대한 염원과 휴전 성립 이후의 안보에 관한 미국의 보장을 받아내는 데 있었다. 1953년 3월 하순 그 동안 정체되었던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으며, 이에 비례하여 휴전반대국민대회 또한 열기를 더해 갔다.
이러한 국민의 절대적인 호응에 힘입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서야 비로소 한국 국민의 동의 없이는 휴전의 실효성을 거둘 수 없음을 알게 된 미국은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 5개 항을 보장했으며, 한국 정부는 유엔군측의 휴전협상 조건에 동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