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는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단체인 무산자동맹회를 결성하고, 신간회 복대표위원회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공산주의자이다. 1895년 충청북도 진천군 출생으로, 3·1운동 참가 후 일본으로 도피해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했다. 귀국 후 사회주의 단체인 무산자동맹회를 결성하고, 러시아로 건너가 고려공산당대회에 참가했다. 코민테른의 지시로 조선공산당 조직 완성을 위해 서울에 잠입했으나 국내파의 냉대를 받았다. 1929년 6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된 후, 모스크바에서 적색노동조합 결성을 도모하다 체포되었다.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895년 충북 진천군 진천면 읍내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1916년 진천공립보통학교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 때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일제의 검거를 피해 강원도로 도피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을 하였다. 일본대학(日本大學) 2개월 간 학습하였고, 동경 유학시절부터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1922년 귀국하여 3월 윤덕병(尹德炳)·신백우(申伯雨)·김한(金翰) 등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 단체인 무산자동맹회를 결성하고, 같은 해 러시아로 건너가 베르흐네프진스크에서 ‘고려공산당대회(소위 상해파 세력과 이르크츠크파 세력의 합동대회)’에 참가하였는데, 처음에는 무소속 국내파로 분류될 수 있었으나, 당시 이르크츠크파에 가담한 것으로 판단된다.
1922년 12월 중순 경 고려공산당대회가 양 파의 알력으로 무산되고,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코민테른의 명(命)에 의해 모스크바행 일행에 가담하였다. 일부 기록에는 1921년의 3차 코민테른 대회나 제4차 코민테른 대회(1922년 11월 7일∼12월 3일)에 참가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시기상 일치 하지 않으므로 오기라고 판단된다.
1922년 말 코민테른의 기존 한인 공산당 조직 해산 및 국내에 코민테른 지부로서의 단일 조선공산당 조직을 완성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준비 작업으로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산하 민족부 산하 극동총국의 블라디보스톡 출장소에 꼬르뷰로(Корбюро, 高麗部)가 설치되면서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23년 6월 조선내 사정을 알아보기 위한 조사 사업차 꼬르뷰로의 파견 결정에 따라 서울에 잠입하였고, 당시의 국내 공산주의 그룹들과 접촉하였다. 그러나 이동휘 계열의 악선전과 국내파의 당시 해외파에 대한 거부감 등등으로 냉담한 응대를 받았다.
1924년 4월 꼬르뷰로 내부의 한인간의 질시와 반목으로 결국 코민테른으로부터 꼬르뷰로 해산명령을 받았다. 국제공산당은 꼬르뷰로를 대신해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위한 오르그뷰로(組織局)’를 구성하고, 오르그뷰로의 명으로 1924년 6월 서울 잠입하여 국내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접촉하였으나, “국내에서 자발적으로 당을 조직하여 코민테른에 가입할 터이니 해외에서는 간섭하지 말라”는 반발만 받았다.
1924년 9월, 같은 임무를 띠고 오르그뷰로에서 파견된 이재복(李載馥) 등과 함께 검거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9년 6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新幹會) 창립 이래 최초로 소집된 전국적 성격의 회합인 복대표위원회(複代表委員會)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1929년 9월에 검거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929년 12월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고, 1931년 12월 코민테른의 지시로 국내에 잠입한 이후 혁명적 비합법 노동조합인 적색노동조합 결성 도모하였고, 1933년 12월에 검거되어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1944년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항일비밀결사인 건국동맹에서 활동하였고, 1944년 7월에 다시 체포되었으며,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