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연합사령부 ()

정치·법제
단체
한국전쟁기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愿軍)의 참전으로 북한과 중국 간의 작전 수행 시 지휘통수권을 일치시키기 위해 설립한 연합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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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조중연합사령부는 한국전쟁 때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북한과 중국 간의 작전 수행 시 지휘통수권을 일치시키기 위해 설립한 연합사령부이다. 한국전쟁 시 중국의 전쟁 참전으로 북한과 중국의 군사지휘권 문제가 제기되었다. 1950년 12월 김일성과 팽덕회의 합의하에 비공개로 조중연합사령부가 설립되었다. 팽덕회가 사령원 겸 정치위원, 북한 측 김웅과 박일우가 각각 부사령관, 부정치위원이 되었다. 제3차 전역부터 조중연합사령부가 작전을 지휘하고 실제로 한국전쟁을 주도하였다. 1951년 3월에는 북한·중국 공군연합사령부도 설립하였다. 휴전 무렵 해체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의
한국전쟁기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愿軍)의 참전으로 북한과 중국 간의 작전 수행 시 지휘통수권을 일치시키기 위해 설립한 연합사령부.
개설

조중연합사령부(朝中聯合司令部)는 1950년 12월 상순 김일성과 팽덕회(彭德懷)의 합의하에 대외적으로는 비공개로 설립된 기구이다.

설립목적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북한과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하면서 작전의 통일성을 지향하기 위해 수립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개전되고, 전쟁 발발 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어 전세는 남한에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개전 2달 만에 북한군은 한반도 전역을 석권하였고, 유엔군사령부는 낙동강방어선에 고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9월 15일 미군이 크로마이트(Chromite)라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전쟁 직전의 상태로 회복한 이후 38선 돌파를 감행, 평양으로 진격하자 북한과 소련은 중국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중국은 초기에는 한국전쟁 참전에 대해 난색을 표명하였지만, 치열한 내부 논의 끝에 중국인민지원군 파견을 결정하였고, 10월 19일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중국은 전쟁 참전 이전부터 지휘권 문제에 대해 논의를 제기했었다. 10월 14일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에 입북하기 전 주은래(周恩來)는 스탈린(Stalin, Joseph)에게 중국인민해방군(中國人民解放軍)이 지원군의 형식으로 조선에 들어가 작전을 할 때, 쌍방의 지휘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문의하였으나 전쟁 초기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시 상황에서 북한군과 중국군의 군사지휘권 문제는 일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1차 작전기간(1950. 10. 19.∼11. 5.) 중에 팽덕회는 북한과 중국 사이에 협조가 부족하고, 언어가 다르며, 지형에 대해 익숙하지 못하여, 북한의 군대와 인민들이 퇴각하면서 도로를 봉쇄하는 등 중국인민지원군의 군사작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수차례에 걸쳐 모택동(毛澤東)에게 보고하였다. 특히 1950년 11월 4일 지원군 제39군은 박천 부근에서 미 제24사단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순천을 향해 진격하는 인민군 탱크사단이 39군을 오인하여 공격하는 바람에 미군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서부전선 2차 전역이 끝났을 때, 이 문제는 다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1950년 11월 16일 김일성이 북경에 갔을 때, 모택동, 주은래, 류소기(劉少寄)와 함께 조중연합사령부의 문제를 협의하였다. 양측은 북한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연합사령부를 설치하여 모든 작전범위와 전선의 모든 활동을 지휘하도록 하였고, 후방동원, 훈련, 군경, 경비 등은 북한정부가 직접 관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철도수송 및 수리 또한 연합사령부가 지휘하도록 하였다.

연합사령부는 북한인민군참모부와 중국인민지원군부대가 사령부 2개 기구로 나누어 한 사무실에 함께 있도록 하였고, 팽덕회가 사령원 겸 정치위원이 되고, 북한 측 김웅(金雄)이 부사령관이 되었고, 박일우(朴一禹)가 부정치위원이 되었다. 또한 연합사령부는 대외에는 공개하지 않고, 대내에서 문서상으로만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북한·중국 연합지휘부 성립에 대한 중국·북한 쌍방 합의문」이 작성되었다.

결국 12월 7일 김일성과 팽덕회가 북한에서 회담을 하여 수일 내로 조중연합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고, 12월 8일 주은래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을 대표하여 조중연합사령부의 설치에 관한 전문을 작성하였다. 이후 조중연합사령부가 정식으로 창설되어 연사(聯司)로 간략히 칭하게 된다. 김일성은 이후에 더 이상 군사적 지휘문제에 간여하지 않았고, 북한군 제3군단을 중국군 제9병단에 가깝게 이동시켜 중국군 제9병단 송시륜(宋時輪)의 지휘아래 두는 결정을 하였다. 이제 북한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작전지휘통일 문제가 해결되고, 제3차 작전(1950. 12. 31∼)을 시작할 때부터 조중연합사령부가 단일기구로 작전을 지휘하였다.

조중연합사령부는 1950년 12월 상순에 창설되어 전쟁 기간 내내 전쟁 수행을 주도하였으나 정확한 해체 시점은 확인되지 않고, 다만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되었을 무렵에 해체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기능과 역할

3차 전역 이후부터 북한과 중국의 전쟁 작전을 직접 지휘하였고, 이후에 북한과 중국은 협의를 거쳐 1951년 3월에 연합사령부의 구성 원칙을 참고하여 북한·중국 공군연합사령부도 설립하였다.

의의와 평가

중국은 전쟁에 참전을 결정했을 당시부터 북한에서의 전쟁 수행에 있어서 군 통수권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은 중국에게 파병을 요청하여 북한군의 방어를 돕도록 하면 군대 지휘통수권은 자연스럽게 북한지도부가 장악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로의 계획과 의도는 달랐지만, 결국 전쟁 수행과정에서 연합사령부 구성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비록 조중연합사령부가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았고, 중국 측이 주도한 기구였으나, 3차 전역 이후로는 실제로 한국전쟁을 주도하였다.

참고문헌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 1945~1961』(서동만, 선인, 2005)
『한국전쟁과 중국 Ⅱ』, (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 2002)
『북한·중국관계, 1945~2000』(이종석, 중심, 2001)
「전쟁기 중국지도부와 북한지도부 사이의 모순과 갈등」(양진삼,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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