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으로, 1998년 1월 19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단층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평면 방형의 일반형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4.85m이다. 현재 시멘트와 자연석으로 구축된 평면 방형의 높직한 기단(한 변 너비 3.8m, 높이 1.4m) 위에 건립한 까닭에 원위치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길이 2.6m의 지대석 위에 4매의 판석을 사용해 단층기단을 조성했다. 기단의 상면에는 1매의 판석으로 조성된 기단 갑석을 놓았는데, 하면에는 부연을, 상면에는 각형 1단의 탑신 괴임대를 조출했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각 한 돌로 조성했다. 초층 탑신은 한 변이 1.1m, 높이가 1.14m로 거의 정방형에 가까움에 비해, 2층 이상은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축소되어 전체적으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옥개석 역시 1층이 다른 층에 비해 크게 조성되었다.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해 수평을 이루는 처마는 전각에 이르러 둔중한 반전을 보이고 있으며, 옥개석의 각층 하면에는 각형 3단의 옥개받침이 조출되었다. 정상에는 한 돌로 조성된 노반석 상면에 새로 만든 높직한 노반과 연봉형 보주를 놓았다.
현재 무성리 논 가운데 위치하며 개인 소유로 되어 있다. 석탑의 주변에 「무성리삼층석탑 복원기념비문(武城里三層石塔復元記念碑文))」이 있는바, 전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창설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이 탑의 북편에 위치하고 있는 좌상석불과 아울러 미루어볼 때, 삼국시대 말엽으로 추정되는 유서 깊은 불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유구한 세월을 내려오다, 근세에 와서 1935년 을해(乙亥)에 때마침 칠보면 주재소 신축비 부족액 500냥을 충당하려고 본 삼층석탑을 일본인에게 매각하여 바야흐로 해체할 즈음에, 본면 시산리(詩山里) 남양후인(南陽后人) 홍순석(洪淳錫)씨가 경작답(耕作沓) 삼두락(三斗落)을 당시 칠보금융조합에 저당하여 금 오백냥으로 이를 환퇴(還退)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그 숭고한 민족정신을 새삼 추모하는 바이다. 1975년 을묘(乙卯) 7월에 한때 칠보국민학교 교정으로 이건(移建)했었으나, 향토문화유산을 원형으로 보호하자는 중의에 따라, 1981년 신유(辛酉) 12월에 일본국 동경 거주 무성리 출신 도강후인(道康后人) 김진섭(金鎭燮) 창섭(昌燮) 석공(錫公) 삼형제가 사재를 들여 이에 원위치로 복원하여 영구히 존립하게 되었으니, 그 높은 뜻을 새겨 기념하는 바이다. 서기 1984년 3월 일. 치보향토문화재보존회장 권오중 지.”
이 석탑은 각 부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탑신에 비해 기단부가 왜소하고 낮을 뿐만 아니라 초층 탑신을 구성하는 부재가 다른 층에 비해 크고 높게 조성되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결여되어 있으나, 고려시대 석탑 연구에 학술적 자료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