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왕검성(王儉城)이라고도 한다. 정양산성과 관련된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세종실록지리지』권153에 “정양산석성은 군의 동쪽 십리에 위치하고 둘레가 798보이며 샘이 1곳 있는데 크게 가물면 간혹 마르기도 하며, 또 5칸의 창고가 있다(正陽山石城 在郡東十里 周回七百九十八步 內有一泉 大旱則或渴 又有軍倉五間).”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영월 고적조에는 “正陽山城 石築 周二千三百十四尺 高十九尺(정양산성 석축 주이천삼백십사척 고십구척)”이라 기록되어 있고, 『연려실기술』별집 권17 변어전고(邊圉典故) 폐산성(廢山城)에서는 “寧越正陽山城 郡東十二里 石築(영월정양산성 군동십이리 석축)”이라 하였다. 『증보문헌비고』권28 여지고16 관방4 성곽4에는 “寧越正陽山城 在東十里 石築 周二千三百十四尺 高十九尺 今廢(영월정양산성 재동십리 석축 주이천삼백십사척 고십구척 금폐)”라 하였으며, 『대동지지』영월 성지조에는 “正陽山古城周二千二百十四尺(정양산고성주이천이백십사척)”이라 기록되어 있다.
현재 산성의 위치는 영월읍 정양리 산1-1(내성) · 산122(외성) 일원으로, 영월화력발전소 동남단에서 산의 능선을 따라 계족산(鷄足山) 등산로를 오르면 정상 부근에 위치한다. 등산로 입구에서 능선을 따라 오르다 보면 조선시대 정조대왕의 태실(胎室)이 나타나고 이곳을 지나 계속 올라가면 외성(外城)의 문터를 지나게 된다. 외성 문터를 지나 다시 남동향하여 오르면 비로소 거대한 석성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산성의 내성(內城)이다. 이처럼 정양산성은 크게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어 축조되었으며, 별도로 4단의 차단벽이 있다.
산성의 구조와 출토 유물로 보건데, 축조 시기는 삼국이 한강 유역을 놓고 다투던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에는 이미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이후 수축을 거쳐 조선 초까지 산성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양산성은 사방이 높고 성안이 움푹 들어간 고로봉형(槁栳峯形)의 산성으로, 자연석을 이용한 얇은 판상석(板狀石)의 점판암 석재로 수평 눈 줄을 맞추어 정연하게 축조되었다.
영월은 남한강 상류로 충청북도 단양과 함께 삼국 항쟁의 중심지였으므로, 정양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축조된 태화산성(太華山城), 대야산성(大野山城), 온달산성(溫達山城), 완택산성(莞澤山城) 등도 축조 시기와 성격에서 서로 관련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 산성에 대해서 정영호는 왕검이라는 명칭과 성의 축조방식을 고려하여 축조시기를 고구려시대라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으며, 차용걸은 성의 축성기법으로 보아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과 비견될 정도로 기초보강축조부가 신라 축성기법을 많이 따르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성의 전체 면적은 118,637㎡이며, 둘레는 약 1,060m이고, 성벽의 평균 높이는 약 8m, 너비는 평균 7m가 된다. 현재 3군데에 현문(懸門) 형식의 문터가 있고 3군데의 회절(回折)하는 곳에는 치성(雉城) 혹은 곡성(曲城)을 시설한 흔적이 확인된다. 전체적으로 성벽의 잔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고 북문의 경우 양쪽 문지가 잘 남아 있다. 외성은 총 길이가 570m이고, 이 가운데 성벽 북동쪽과 서북쪽의 약 340m만 인공적으로 성벽을 구축했고 나머지 구간은 가파른 석벽과 단애면(斷崖面)을 성벽으로 이용하고 있다.
성벽의 형태는 내성의 서쪽에서 연장되어 서쪽 계곡을 보다 넓게 에워싼 형태를 갖추고 있다. 성벽은 북동쪽 · 서북쪽 · 남쪽으로 구성되며, 동남쪽은 내성과 연결된다. 서북쪽 성벽에는 1개의 문터와 배수처(排水處)가 있으며, 동북쪽 성벽에도 1군데에 문터로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
이 산성에서 남쪽 밑을 보면 남한강의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한눈에 들어와 남한강을 따라 영월로 들어오는 적의 동태를 손바닥처럼 읽을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험준한 고산의 장벽을 피하여 상류에서 하류로 진출하는 유일한 통로로 지리적으로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이때의 전술적 개념은 명확하지 않으나, 백제와 고구려의 경우는 이 길을 통해 경상북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북상하는 신라를 막으려 하였을 것이고, 신라로서는 이 통로를 통해 북상하면서 요새지를 구축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려 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