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경(李厚慶, 1558∼1630)은 본관이 벽진(碧珍), 자는 여무(汝懋), 호는 외재이다. 참판을 지낸 이엄(李儼)의 아들로, 형 이석경(李碩慶)의 소개로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학행이 뛰어나 영남의 명유로 추앙을 받았다. 광해군 때 판서 이시발(李時發), 문정공(文貞公)김우옹(金宇顒) 등의 추천으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때 다시 창악승(昌樂丞)에 제수되었다가 정묘호란(1627년) 때 왕이 강화도에 몽진하자 이를 수행하였고 서울로 돌아온 후 호종의 공으로 음성현감에 제수되었다. 사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1703년(숙종 29)영산(靈山)의 덕봉서원(德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아들 이도보(李道輔, 1587∼1651) 역시 정구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특히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정묘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다. 후일 학행으로 추천되어 제릉(齊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외재이후경의 문집『외재집』과 익암이도보의 문집『익암집』의 책판은 총 82매로, 1998년 11월 13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어, 창녕군 길곡면 증산리 벽진이씨 외재공파 문중에서 관리하는 경덕서당에 소장되어 있다.
외재이후경의 문집 『외재집』은 1744년(영조 20) 그의 후손들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이 문집에는 이후경의 아들인 익암이도보의 익암유고(益庵遺稿)도 함께 실려 있다. 이 두 사람의 문집을 하나로 묶어 출판하기 위해 1864년(고종 1)에 총 82매로 판각하였다. 각 판목의 크기는 가로 45㎝, 세로 22㎝이며, 보관 상태는 양호하여 전체적인 내용을 잘 알 수 있다.
이후경 부자는 왜란과 호란이라는 국난의 시대를 몸소 겪으며 살았던 인물로, 부자의 시문이 함께 실린 문집 판각이 전해오고 있어 좋은 선례를 남기고 있다. 또한 이들의 글에는 당시 사대부들의 성리학에 대한 관심과 시국인식, 그리고 우국충절이 고스란히 배어 있어 훌륭한 사료가 된다.
이들 문집은 조선 중기 향촌 사대부들의 학행, 사회인식, 시국관, 향촌문제 등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어 당시의 향토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