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김해 출신. 본관은 전주. 자는 제경(濟卿), 호는 월헌(月軒). 경종조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여주에서 김해로 피난한 소요재(逍遙齋) 이춘흥(李春興)의 7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조부 농은(農隱) 이경현(李慶鉉: 1859∼1936)과 부친 봉정(鳳亭) 이승기(李承驥: 1885∼1945)의 훈도 아래 가학을 전수받아 경사(經史)를 섭렵하고, 1920년 봄 서해의 계화도에 은거하고 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찾아가 그 문도가 되었다.
간재 문하에서 혁재(赫齋) 서진영(徐震英), 양재(陽齋) 권순명(權純命), 현곡(玄谷) 유영선(柳永善) 등과 학문을 강마하다가, 간재가 별세하자 서진영을 따라 변산의 진계정사(眞溪精舍)로 가서 학문을 익히다가, 호서의 망화재(望華齋)로 석농(石農) 오진영(吳震英)을 찾아가 그 학문을 전수받았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강화되어 단발령을 내리고 호적을 새로 고치는 등의 압제가 가속화되자, 수사선도(守死善道)의 일념으로 굴하지 않고 서재를 열어 원근의 학도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집이 좁아서 모두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보림은 석담과 화양동으로부터 유래하는 담화종지(潭華宗旨)를 평생의 학문 규범으로 삼았는데, 「지심설(持心說)」과 「사유제왕지책론(士有帝王之責論)」등의 잡저에 그 학문 특색이 잘 드러나 있다. 해방 후에도 윤리를 부식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문집인 『월헌집(月軒集)』 16권이 간행되었다.
1986년 향사림(鄕士林)이 김해시 장유의 덕정(德亭)에 명휘사(明輝祠)를 건립하여 향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