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사에 따른 창립시기는 1947년 9월이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이른 1946년 봄부터 문을 열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는 미술 연구소의 역할을 했다. 매월 300원의 강습료를 받았다. 1946년부터 1947년까지는 돈암동에 위치했고 1948년에는 명륜동으로 이사했다. 돈암동 연구소는 이쾌대의 사재로 임대한 40여 평의 공간이었다. 연구소는 1949년 말까지 지속되다가, 1950년에는 이해성(李海晟)과 같이 설립한 남산시립미술연구소로 이어가게 된다.
이쾌대는 학생들에게 해부학과 예술론 등을 강의했고 크로키, 석고 데생, 누드 데생 등을 강습했다. 연구소에서 배운 학생들의 회고에 의하면, 주로 형태에 집중하는 데생수업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인체에 대한 세밀한 해부학적 지식을 인상깊게 배웠다고 한다. 연구소의 학생들로는 김서봉(金瑞鳳), 김숙진(金叔鎭), 김창렬(金昌烈), 남경숙(南慶淑), 심죽자(沈竹子), 이영은(李英恩), 이용환(李容煥), 장성순(張成筍), 전뢰진(田礌 鎭), 정정희(鄭晶姬) 등이 있다. 한때 학생의 수가 삼십 여 명에 이르렀으며, 누드데생을 할 때는 모델이 귀한 시절이라 화가들이 많이 찾았고, 동양화를 하는 이들도 연구소를 찾았다. 대체로는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작업하면서 때때로 이쾌대가 작품을 지도해 주는 느슨한 형식이었고, 돈암동 시절에는 매주 주제를 정해 이쾌대가 강습을 했다. 연구소 공간은 이쾌대 자신의 대작을 그리는 작업실로 이용되기도 했다.
해방공간에 설립된 미술연구소의 수는 30곳 가까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크고 활발하게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중진으로 성장한 작가들이 다수 배출된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