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당시 네 개 항목의 선언과 기본이념을 밝혔다. 첫째, 진취적인 이념으로 민족문화의 발전향상을 기하자. 둘째, 순수한 제작태도와 발표기구를 확립시키자. 셋째, 새로운 세대들의 진출을 적극 지원하자. 넷째, 조속히 국제미술문화와의 제휴를 도모하자.
1955년 5월 21일에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당에서 창립총회 후 발족했다. 위원장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대 학장이었던 장발(張勃)이었고, 기존의 미술단체였던 대한미술협회의 전람회에서는 설치되지 않았던 사진부와 건축부를 신설하였으며 폐지했던 서예부도 포함하였다.
각 부문 위원으로는 회화부에 동양화가 장우성, 서세옥, 배렴, 장운상, 노수현, 서양화가로는 문학진, 장욱진, 이세득, 장발, 김병기, 이규상, 박득순이 선출되었고 조소부에 김종기, 김세중, 장기은, 응용미술부에 한홍택, 김정환, 이순석, 서예부에 배길기, 김충현, 손재형, 사진부에 임응식, 지부원, 최창희, 건축부에 이희태, 김정수, 김태식 등이었다. 전체 회원은 118명이었다.
1950년대 미술단체로 대한미술협회가 있었으나 한국미술가협회가 결성되면서 양 단체는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한국미술가협회가 결성된 계기 자체가 미술가들의 대립의 결과였다. 즉 1955년의 대한미술협회의 정기총회에서 위원장 선거를 두고 전 위원장이었던 고희동(高羲東)과 장발이 경합했다. 투표 결과 득표수에서는 고희동이 앞섰으나 과반수 획득에 한 표가 부족하다는 장발 측의 주장이 엇갈렸고 다음날 신문에는 고희동이 당선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에 장발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대한미술협회를 탈퇴하여 한국미술가협회를 결성했던 것이다. 한국미술가협회 출범 이후 대한미술협회의 위원장이었던 고희동은 “분열과 파괴를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이때 고희동의 지지세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였던 윤효중(尹孝重)을 중심으로 했고 장발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이었기 때문에 ‘홍대파’와 ‘서울대파’의 대립으로 일컬어졌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심사를 놓고 대립했던 한국미술가협회와 대한미술협회와의 갈등이 불거져 1956년에는 이른바 ‘국전분규’ 혹은 ‘국전보이콧’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국전의 심사위원을 한국미술가협회 인사들이 차지하자 이에 반발하여 대한미술협회가 국전 참여를 거부한 사건이었다. 문교부의 중재로 대한미술협회의 심사위원을 추가하여 무마가 되었으나 한국미술가협회의 젊은 회원 10여 명은 출품을 거부했다.
1961년 5.16 이후 모든 문화단체를 일원화 하는 정책에 따라 그해 12월 18일에는 한국미술가협회와 대한미술가협회를 통합한 ‘한국미술협회’가 발족되면서 한국미술가협회는 해체되었다.
제1회 한국미술가협회전이 1956년 6월 15일부터 경복궁내 국립미술관에서 개최될 예정으로 협회 동인 및 일반에게 작품을 공모했다. 모집 분야로는 회화(동양화와 서양화), 조각, 응용미술, 건축, 서예, 사진의 6개 부문이었다. 그러나 전람회장 확보 문제로 그 시기가 연기되어 1956년 9월 21일부터 10일간 휘문고등학교 강당에서 1회 협회전이 개최되었다
1961년에는 제2회 전시가 개최되었다. 4월 27일부터 5월 14일까지 경복궁 미술관에서 개최되었으며, 회원전과 일반공모전을 겸했다. 동양화, 서양화, 조각, 응용미술, 서예, 건축, 사진 등 7개 부문에 결쳐 전시했고 5월 13일에는 중앙공보관에서 시상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