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출신의 서양화가로, 대구의 지역 화가 집단인 향토회에서 활동하면서 1930년부터 1935년까지 향토회전에 출품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입선시키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이후에는 미술에 뜻을 접었다. 1940년대 후반에는 군수로 재직했다.
일본의 동경명치학원(東京明治學院)에 유학했으나 전공 및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귀국 후 「문단병환자」라는 평론을 1926년 11월『동아일보』에 실은 바 있다. 이 글에서 최화수는 ‘문예 창작가는 시대의 인심(人心)을 대표한 발언자이며 민중 감정의 표현자’라는 문예 창작가론을 피력하였다. 김용준(金瑢俊)은 최화수가 문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소설까지 발표했다고 회고하였으나 그의 소설 작품이 확인된 바는 없다. 1927년 7월에는 동아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임명되었으며, 1930년 1월에 사임했다. 이후에는 1930년대 후반까지 대구 지역에서 서양화가로서 미술활동에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최화수의 서양화가로서의 활동은 크게 두 분야로 나뉜다. 하나는 그의 출생지였던 대구 지역의 화가 집단인 향토회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입선한 것이다. 그는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결성된 지역 중심의 미술가 집단인 향토회(鄕土會)의 창립회원이었으며, 지속적으로 향토회전에 출품했던 주요 멤버였다. 1930년 제1회 향토회전에 참가한 이후 1935년 제6회전까지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고 전시했다.
향토회는 대구 출신 화가들의 서양화가들인 이인성, 서동진, 박명조, 김성암, 김용준, 배명학 등이 창립한 순수미술 지향의 화가 집단이었다. 향토회는 매년 가을 대구의 조양회관에서 동인들의 전람회를 개최하였고 (6회에는 이비시야 백화점 2층 홀) 대구지역 화단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구심적 역할을 했다.
최화수는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이후, 1932년을 제외하고, 1936년 제15회까지 매년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시켰다. 6회에 걸쳐 입선한 작품 목록은 제9회 「교외 풍경」, 제10회 「성탑(聖塔)」, 제11회 「오후의 전원」와 「소장(素粧)」, 제13회 「풍경」, 제14회 「포항항구(浦項港口)」, 제15회 「빨간 의자 위의 정물」이다. 출품한 작품은 대부분 풍경화이며 정물화와 여성인물화가 한 점씩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하여 미술활동을 지속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며, 실업계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에는 경북 달성(達城) 군수로 취임하여 1949년까지 재임한 사실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