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으로 일본 제국미술학교에 유학하고 신미술가협회에 참여하였으며 해방이후 1950년까지 여러 미술가 단체에서 활동했다. 1970년대에도 구상화가로서 작품활동을 지속했다.
1930년 경성 재동(齋洞)공립보통학교 학생으로 동아일보사 주최 전조선학생전람회에서 삼청동을 그린 풍경화로 2등상을 받았고, 1935년 9월 20일 경성 배재고보(培材高普) 4년생(19세)때 동아일보사 주최 전조선학생작품전에 입선했으며, 1935년 제14회 서회협회전에 출품하였다.
1937년 일본 제국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현 무사시노(武藏野)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하였고 1941년에 졸업하였다. 유학 중에도 활발한 활동을 보였는데, 1938∼41년의 재동경미협전에 출품했으며, 1938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소년의 정면좌상을 그린 「코스튬」을 동경에서 출품하여 입선했다. 1940년 3월 1일부터 24일까지 동경 우에노(上野)미술관에서 개최된 제1회 독립미술전에 「소녀상」으로 입선했다.
한편 1942년 잡지 『조광(朝光)』에 실은 글 「문학성과 조형성」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회화관과 조형원리를 피력하기도 했다.
1942년에는 5월 13일부터 17일까지 화신화랑에서 열린 신미술가협회 전람회에 신입회원으로 참가했다. 신미술가협회는 1941년에 이중섭, 문학수, 이쾌대 등 동경에 유학온 서양화가들이 창립한 단체로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개성적인 화풍을 추구했다. 1943년에도 신미술가협회전과 재동경미협전에 참가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1946년 1월조선미술가협회에 참여, 1946년 독립미술가협회전 참여, 1950년 1월 오십년미술협회(五十年美術協會) 회원이었음이 확인된다.
1950년대 이후 작가의 활동사항은 확인된 바가 적은데, 1977년 7월에서 1981년 5월까지 중견 구상화가 그룹전인 한국신미술회전(韓國新美術會展)에 매년 출품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2002년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