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명천 출생으로, 호는 목랑(木郞)이다. 1926년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를 다닌 후 도일하여 도쿄 니혼미술학교(日本美術學校) 회화과에 입학하였다. 귀국 후 조선미술전람회에 8회 수상하였다. 김천에서 교편생활을 하였으며, 1965년 대구 효성여자대학 생활미술과 주임교수를 역임하였다.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발간한 시집 때문에 일본 경찰에 수배되어 졸업 후 만주로 도피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니혼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5년 니혼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 후 가와바타 류시(川端龍子)에게 일본화를 전수 받고 일본화풍을 습득하였다. 이후 일본인 다무라치요코(田村千代子)와 결혼하였다. 그 해 제12회 국화전에 입상, 제7회 청룡사전에 입상하였다.
1936년 조선으로 귀국하여 1937년 조선일보사 광고부에 입사하는 한편,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서양화와 동양화부에 3점이 입선하였다. 1940년 8월 11일 조선일보사의 강제 폐간으로 퇴사하여 김천고등보통학교(현 김천중,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하였다.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탄금도(彈琴圖)」로 동양화 특선과 함께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 해방 후 김천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다가 김천여자고등학교, 문경고등학교, 경부여자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영주여자고등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면서 작가로서보다는 교육활동에 집중하였다. 1965년 효성여자대학 생활미술과 주임교수로 취임하면서 미술활동을 활발하게 하였고,많은 조선미술전람회 작가들이 채색화에서 수묵으로 돌아선 반면, 그는 일본화풍을 계속 이어갔다. 1978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일본미술전 은상(1934)
제12회 국화전 입상(1935)
제7회 청룡사전 입상(1935)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 「당신자(唐辛子)」, 「승무(僧舞)」입선, 서양화 「구상여인(丘上女人)」입선.
제17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 「참묘(參墓)」입선.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 「구홍(口紅)」, 「여일(麗日)」입선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 「탄금도(彈琴圖)」특선(창덕궁상), 「봉선화(鳳仙花)」입선.
제20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 「한운(閑韻)」(무감사 출품).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 「암향(暗香)」, 「농악(農樂)」입선.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 「가일(佳日)」입선.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 「대춘(待春)」입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