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진

현대사
인물
해방 이후 농림부차관, 보건사회부차관 등을 역임한 관료.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1년 4월 14일
사망 연도
2009년
출생지
평안남도 대동군 청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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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농림부차관, 보건사회부차관 등을 역임한 관료.
개설

한국진은 5.16 군사 구테타를 전후로 농림부 차관과 보건사회부 차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임시군사정부 하에서 브라질 이민을 관장하던 부사부 차관으로 브라질 이민에 깊게 관여했다. 1960년대 5차에 걸친 집단영농이민이 실패하자 한-브라질 협회장이었던 그는 1970년 해외개발공사(KODCO)를 설립하고 본인이 직접 브라질 지사장으로 부임하며 농업이민 대신 기술이민을 추진하여 이민의 물꼬를 다시 튼 장본인이다. 그런데 그 역시 브라질에 정착해서 2009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족과 함께 브라질에서 생활했다.

한국진은 임시군사정부 수립이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 보건사회부 차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보건사회부는 혼혈 고아들의 해외입양을 담당했던 주무 부서였는데, 1960년대 초 브라질 이민이 구체화되면서 이민 관련 업무를 동시에 담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 한국진 보건사회부 차관은 브라질 이민 관련 업무를 직접 지휘하여 1962년 12월 15일 제1차 농업이민이 네덜란드 선박 찌짜렌카(Tjitjalenka)가 부산에서 출항할 때 환송회를 주관하기도 했다.

그런데 농업이민으로 브라질에 도착한 약 1,300명의 한국인들이 농촌에 정착하지 않고 가까운 도시에 정착하자 브라질 정부는 한국인들의 농업이민을 금지시켰다. 한국진 차관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브라질 협회장의 자격으로 브라질 노동청과 법무부를 방문했다. 그리고 기술이민이라는 새로운 이민의 물꼬를 터서 약 1,400명을 기술이민으로 브라질로 보낼 수 있었다.

생애

한국진은 1921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중앙대학교 상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한국에 돌아온 그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또 다시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입학했다. 그리고 5.16 임시군사정부시절 농림부 차관과 보건사회부 차관을 역임했다.

브라질은 이민의 나라로 상당히 매력적인 나라였다. 이민의 책임자였던 그가 한국개발공사 브라질 지사장으로 발을 디디면서 브라질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는 브라질 생활 초기에 한국 사람들이 집단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공동체 건설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우선 대지를 구입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한국인 목사로부터 사기를 당해 그는 자신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전재산을 잃은 그는, 원래 독실한 기독교 신자답게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브라질에서 훼이스(Faith) 신학대학을 졸업한 다음, 기독교 교육학 박사도 취득했다. 그리고 에덴교회를 세웠다. 그의 마지막 사회활동은 자신이 세운 교회의 담임목사였는데, 그동안 달라진 그의 괴팍한 성품과 10년 이상 병으로 앓아누운 아내를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교회 신도의 수는 20명을 넘지 않았다.

활동사항

김수조와 정인규가 브라질 이민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게 되자, 주무부서였던 보건사회부의 한국진 차관은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서 1962년 3월 이민교섭단장으로 브라질을 방문했다. 그 때 그를 동행한 사람은 외무부의 변훈 과장, 조기성 사무관, 오재희 사무관 그리고 당시 「한-백 이민 협회」의 한종민 회장이었다.

그의 일행 다섯 명은 브라질로 가는 중, 우선 미국의 워싱톤에 머물렀다. 한국진 차관은 당시 정일권 주미대사와 브라질 이민 교섭 경위를 상의했다. 그리고 브라질 리우공항에 도착해서 정인규 일행과 조철 영사대리와 합류했다.

브라질에 도착한 다음 날인 3월 24일부터 그의 일행은 이민 후보지역 -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 주(州) 나따니엘 농장(Fazenda Nathanael)과 상파울루 주(州)의 까뻥 보니뚜(Capão Bonito) - 를 방문했다. 그리고 리우데자네이루로 돌아와 외무부 이주국장의 안내로 외무부 차관과 「브라질 국립 이민 및 식민 연구원(INIC - Instituto Nacional de Imigração e Colonização」 (이 기관은 오늘날의 「브라질 국립 식민 및 농지개혁 연구원(INCRA - Instituto Nacional de Colonização e Reforma Agrária)」으로 바뀌었다) 의 룩스 총재를 만났다. 하지만 룩스 총재가 한국이민자들을 위해 추천한 곳은 브라질에서 가장 낙후된 북부의 고이아스(Goias) 주(州)였다. 이에 한국진 차관은 한인들이 기후나 풍토에 견디지 못한다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자신의 교섭 행위가 정부 대 정부 차원에서 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자신이 주장하는 “농업이민”이 단지 명분에 불과했을 뿐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정부가 영농자금으로 한 세대당 환전해준 2,000달러로는 한국인들이 아마존 오지에서 농노로 전락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브라질 이민 제 30주년 기념』 책자, 「한인회」 1993).

하지만 그의 일행은 4월 3일 브라질 외무부 장관대리로부터 한국이민에 대한 구두허락을 받고, INIC 직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일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일행은 다음 행선지인 과테말라로 떠났다.

상훈과 추모

그는 나중에 자신의 자서전을 출판하긴 했으나 한국정부로부터 주목받지 못했다. 단지 그가 브라질에 사는 동안 그의 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등록되었는데, 그것은 일제강점기 고등법원의 1919년 9월 20일 판결문에 근거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브라질한인이민 50년사(1962~2011)』(브라질한인이민사편찬위원회, 도서출판 교음사, 2011)
『아마존의 꿈 : 브라질 한국인 이민 40년 회고』(오응서, 남미동아일보사: 상파울로, 2004)
「이야기 브라질 한국이민사: 전 보사부 차관 한국진과 초기 이민자 고광순을 중심으로」(최금좌,『포르투갈-브라질 연구』5-2, 한국 포르투갈-브라질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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