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학 ()

언어·문자
개념
몽고어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 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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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몽고어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 언어학.
개설

13세기 전반 고려는 강력한 원의 침략을 받고 재침 우려 속에서 원나라의 사자를 응대하기 위해서 몽골어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 교육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고려와 달리 조선은 몽골과 직접적인 외교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몽학 생도를 충원하기도 어려웠고 역관의 통역 능력도 뒤떨어졌다.

내용

한국 역사에서 몽골어 역관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대에 원나라의 침략을 받고 재침이 우려되면서 고려 정부가 임시적인 기구로 역어도감(譯語都監)을 설치하여 몽골어 교육을 실시한 때이다. 그러나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된 이후 역어도감 출신 역관들이 신분이 비천하고 비리를 저지르는 등 폐단이 많아지자, 1274년(충렬왕 2)에 김구(金坵)의 건의로 통문관(通文館)이 설치되었다. 이후 통문관은 사역원으로 바뀐다.

몽골어 교육이 실시된 고종대로부터 공민왕대까지 몽골어 역관은 역어도감에서 배운 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원나라에 붙잡혀 가서 배웠거나 원 간섭기의 왕들을 수행하면서 배웠다. 하지만 역어도감 출신은 실력이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왕실의 통역은 강수형(康守衡: 초명 康和尙)이나 조인규(趙仁規) 등 특정인이 맡았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사역원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관청에서 1393년(태조 2)에 중국어 교육을 실시한 데 이어 1년 뒤에는 몽골어 교육도 실시하였다. 그 무렵 사역원 제조 설장수(偰長壽)가 중국어와 몽골어 교육을 위한 생도 충원, 시험 제도 등의 대책을 건의하였다. 그의 건의로 몽골어를 습득한 사람 가운데에 번역은 물론, 자양(字樣, 문자의 모양)과 위구르자(偉兀字)를 쓸 수 있는 사람을 뽑았다. 세종대에는 사역원의 생도들이 위그르 문자와 팍바(hPags-pa, 八思巴) 문자를 지칭하는 첩아월진(帖兒月眞)을 시험보았다.

사대교린국의 언어를 학습하고 교재를 삼는다는 조항은 성종대에 반포된 『경국대전』에서 정착되었다. 『경국대전』에 몽골어 교재가 17권이 실렸지만 모두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나 『원사(元史)』에 근거해 보면 『대루원기(待漏院記)』, 『수성사감(守成事鑑)』, 『정관정요(貞觀政要)』, 『황도대훈(皇都大訓)』등은 원대의 중국 문서를 몽문(蒙文)으로 번역한 책이고, 『속팔실(速八實)』,『백안파두(伯顔波豆)』,『토고안(吐高安)』,『장기(章記)』,『거리라(巨里羅)』,『하적후라(賀赤厚羅)』,『왕가한(王可汗)』,『고난가둔(高難可屯)』,『위올진(偉兀眞)』등은 중세 몽골어 단어를 한자음으로 전사한 형태이며, 그 가운데 몇 종류는 아동용 책이다. 『첩아월진』 은 팍바(hPags-pa, 파스파) 문자를 지칭하는 몽골어 ‘dӧrbeljin[üsüg]’의 음역인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과 몽골은 직접적인 외교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생도 지망자를 충원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생도와 현직 역관이 배정된 관직수도 가장 적었다. 이 때문에 몽학훈도의 인원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생도 지망자도 적어서, 오부학당(五部學堂) 또는 경기도·충청도의 향교 생도 및 향리 3정 1자로서 충원하기도 하였고, 빈한한 생도들에게 식량을 보조해 주는 방안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 수시로 나온 명나라 관리를 접대하는 접반사와 수행역관으로, 또 명·일 간에 이루어진 강화협상의 사정을 탐지하기 위해 4개 전공 역관들이 두 진영을 오고 가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몽학 역관은 전란기에 실시된 역관 수습책의 일환에도 불구하고 한학 역관, 왜학 역관, 여진학 역관과는 달리 그리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양란 후에 남은 교재는 『수성사감』, 『어사잠』, 『공부자』, 『백안파두』, 『대루원기』등 5권이었다. 여기에 새로 번역된 『노걸대(老乞大)』가 추가되어 1684년(숙종 10)부터 역과 취재서로 정해졌다. 당시 조선에는 청나라에 대항한 오삼계(吳三桂), 상지신(尙之信), 경정충(耿精忠) 등이 일으킨 삼번(三藩)의 반란 소식이 알려지고 이로 인해 나라 안팎으로 명나라의 부활을 기대하던 시기였다. 사역원에 우어청(偶語廳)을 설치하고 명나라 유민 출신을 훈장으로 임명하여 대화체 방식으로 외국어 교육을 권장해서 한때 성과가 있기도 했다. 몽학의 경우 훈상당상(訓上堂上) 서효남(徐孝男)과 송도 출신으로 몽골에 끌려갔다가 속환된 무과 김효원(金孝源)이 훈장을 맡았다. 우어청 교육은 현지 생활을 경험한 훈장이 죽고 능력 있는 훈장이 잇달아 죽으면서 시들해졌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몽학 교재는 청나라에 연행사로 간 역관들이 현지에서 몽골인과 통역하는 데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사역원 도제조 김재로(金在魯)는 역관 이찬경(李纘庚)이 청에서 구해온 『청몽문감(淸蒙文鑑)』을 몽골어의 교재로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다른 외국어와 마찬가지로 몽학총민청을 설치하여 몽골어 학습을 권장하도록 하였다.

18세기 이후 이세휴(李世烋), 이억성(李億成), 방효언(方孝彦) 등의 몽학 역관들은 연행에 가서 사들여 온 몽골어 교재를 기반으로 몽골어 학습서를 새롭게 편성, 간행하였다. 1741년(영조 17)에 『첩해몽어(捷解蒙語)』가 간행되었고 그로부터 20년 뒤에 이억성이 수입해온 어학서를 참고하여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몽어유해(蒙語類解)』의 내용이 수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정조 시기에 현지 어학서를 참고하여 새롭게 3종의 몽학서를 편성한 것은 언제든 강성한 몽골이 재기할 것을 대비하여 국가에서 몽골어 교육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갑오개혁 시기까지 몽학 역관은 줄곧 선발되었으나, 대다수의 역관들은 현지인과의 대화가 불가능하였다.

참고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통문관지(通文館志)』
「17세기 왜학역관 연구」(이상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2010)
「조선시대 몽고어 학습과 몽학삼서」(송기중,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간행 몽학삼서 해제, 2006)
「역관 홍순명의 경력과 저작 『왜어유해』」(이상규, 『조선시대의 사상과 문화』, 집문당, 2003)
「『경국대전』에 보이는 역학서 서명에 대하여(1)」(송기중, 『국어학』14·16, 국어학회, 탑출판사, 1985·1987)
「고려 역관고: 여원관계를 중심으로」(김수진, 동아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1981)
「조선시대의 사역원제도」(원영환, 『남계조좌호박사화갑기념논총』, 일조각, 1977)
『增訂補注 朝鮮語學史』(小倉進平 著·河野六郞 補注, 西田書店,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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