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높이 165.8㎝, 너비 119㎝, 두께 36㎝.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조각가 윤효중(尹孝重)이 1944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창덕궁상을 받은 목조 조각 작품이다. ‘현명(弦鳴)’이라는 제목은 활시위를 당겨 쏠 때의 긴장한 현이 울리는 소리를 뜻하는 말이다. 전통 복장을 입은 조선 여성이 활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으로는 활시위를 한껏 당기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허리춤에는 여분의 화살을 매달고 작은 주머니를 드리우고 있다.
윤효중은 배재중학교 5학년이었을 때 학생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고 이후 일본의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유학하여 목조 조각을 배웠다. 그가 작품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면서 이름을 알리던 때는 일제의 침략전쟁이 본격화되었던 1940년대이다. 도쿄미술학교 재학 중이던 1940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4학년이었던 1941년에는 전통 복장의 조선 여성을 나무로 조각한 작품 「정류(靜流)」로 특선을 했다. 1942년에는 「대지(大地)」로 입선, 1943년에는 「천인침(千人針)」으로 특선을 했다. 천인침은 전쟁에 나가는 군인에게 한 땀씩 천 명의 여성들이 바느질로 수놓은 것을 선사하면 살아 돌아온다는 속설인데 천인침을 마련하는 여성들의 바느질 모습은 지원병 모집과 징병이 본격화되었던 1943~44년에는 조선에도 흔한 풍경이었다. 1943년에 윤효중은 이토고죠(伊東孝重)라는 이름으로 진명여고에서 가르치면서 내선일체와 일본정신 교육을 위해 설립한 재단법인 대화숙(大和塾)의 미술부 조각과 주임으로 재직했다. 이해에 진명여고를 방문한 영친왕에 바치는 용상(龍像)을 조각했으며 경기도 안성의 명망가 박필병(朴弼秉, 또는 松井英治)의 조각상을 제작하였다.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창덕궁상을 받은 「현명(弦鳴)」에서 여성의 모습은 1940년대에 발행되었던 문예잡지 『춘추(春秋)』의 1941년 10월호의 표지화로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것과 활을 쥔 손이 바뀌었을 뿐 허리춤의 주머니까지 유사하다. 『춘추』의 표지는 전통 복장의 여성 이미지를 선호했는데, 여기에 더하여 활을 쏘는 것은 전통 무예의 이미지로 볼 수 있다.
1940년대는 목검체조와 함께 전시(戰時) 정신훈련을 위해 일본의 무사도 정신이나 신라의 화랑도가 강조되던 시기였다. 윤효중은 이 작품의 수상 소감에서 “시국의 진전에 따라 조선의 여성들이 각 방면에서 발랄한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그 자태를 그리고 아울러 조선 의복의 미를 표현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전쟁을 위해 조선인들을 총동원했던 시국하에 화살을 겨눈 조선 여성이라는 소재는 소위 총후(銃後) 여성의 전쟁 대응 의지와 관련된 것으로 읽힐 수 있었다. 이 시기 농업 증산이나 군복 생산 등 전시 하의 각종 노동에 동원되거나 방공훈련, 교련훈련 등에 임하는 여성의 활동적인 모습은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했다. 또한 대동아 공영권의 제국 국민의 하위지표로서 조선민족의 고유한 전통을 드러내는 전통무(舞), 무속(巫俗), 농악과 같은 소재들이 회화의 주제로 선호되기도 했다.
따라서 「현명」에 나타나는 조선 전통의 궁술, 의복이라는 요소와 무기를 든 여성이라는 소재의 교차는 1940년대 전쟁동원체제하의 일본 입장에서는 제국의 신민인 조선 여성의 전의(戰意)를 드러내주는 주제였던 것이다. 윤효중은 이듬해인 1945년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의 아들이자 가미가제 특공대로 전사했던 아베 노부히로(阿部信弘)의 흉상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1940년대 일제의 전쟁 동원 체제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총후의 조선 여성을 상징하며, 식민지 선전 출품 작가가 지닐 수밖에 없었던 성찰성의 한계와 강력한 국가 동원 체제하에서 이루어지는 제도적 미술활동의 근본적인 문제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