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경상북도 달성에서 출생했다. 1899년 부산 개성학교 초등과를 졸업하고 1904년 10월 시종원 분시어(侍從院分侍御)에 임명되었다. 19061907년 태극학회, 19091910년까지 대한흥학회에서 활동했다. 1913년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임학과를 졸업한 뒤 1913년 8월 이왕직(李王職) 산림사무 촉탁에 임명되었다. 1919년 대구의 계림농림주식회사(鷄林農林株式會社)의 지배인으로 취직해, 1920년 5월 15일 계림농림주식회사와 대동무역주식회사가 병합해 설립된 주식회사 대동사의 지배인이 되었다. 1921년 조선총독부가 만주지방에 거주하는 한인의 동태를 감시하고 내정을 파악하기 위해 한인부영사(副領事) 제도를 만들자, 봉천 주재 일본총영사관 한인부영사에 임명되었다. 1925년 호놀룰루 주재 일본총영사관 부영사로 자리를 옮겼으나, 하와이 거주 한인들이 이를 거부해 축출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귀국 후 1929년 경상남도 양산군수를 지냈고, 1930년 조선총독부 사무관으로 내무국 겸 관방(官房) 외사과에서 근무했다. 1930년 사무관으로 보통시험위원에 위촉되었고, 1931년 간도 조선인을 시찰했다. 1936년 5월 충청북도 참여관 고등관 3등으로 승진해 2년간 재임했으며, 같은 기간 조선총독부 소속관서에서 시행하는 보통시험위원, 조선어장려시험 임시위원회 위원, 문관보통징계위원회 충청북도 위원, 선만척식주식회사(鮮滿拓殖株式會社) 창립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참여관으로 재직하며 내선일체와 농어촌진흥운동 등을 선전하는 연설을 여러 차례 발표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1938년 훈 5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고, 이후 문관분한령(文官分限令)에 의해 휴직한 뒤 의원면직되었다.
1938년 9월부터 약 2년간 조선인 만주이민 사업을 진행한 만선척식주식회사와 자금투자 및 조선 서북지역의 개척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1936년에 설립된 선만척식주식회사의 감사로 활동하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제정책에 적극 협력했다. 1941년부터는 조선인광주식회사(朝鮮燐鑛株式會社)의 감사를 지냈다. 1946년 11월 21일사망했다. 상훈으로는 1934년 훈6등 서보장과 1938년 훈5등 서보장이 있다. 또한 만주국 정부에서도 1937년 건국공로장과 1941년 훈6위 경운장(景雲章) 등을 받았다.
양재하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8·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27∼741)에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