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석(應碩)은 1853년부터 1909년 사이에 활동했던 불화승이다. 현재의 서울과 경기 지역이 주 활동지였지만 이곳에 국한되지 않고 강원도와 경상북도, 전라남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행보를 하였는데 60여 년에 걸쳐서 70여 점의 불화를 제작하였다. 불화의 밑그림인 초본(草本)을 유행시키는 등 19세기 새로운 도상을 창출하였으며 불화 제작뿐만 아니라 불상의 개금, 사찰의 중수와 시주를 모으는 화주(化主)로서도 활약하였다. 당시 왕실 및 상궁 등을 시주로 조성된 불화에서도 주요 화승으로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생몰년 미상이지만 그의 활동 시기를 고려하면 19세기 전반에 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아버지는 을묘생(乙卯生) 김씨(金氏), 어머니는 갑자생(甲子生) 밀양(密陽) 박씨(朴氏)이며, 임오생(壬午生)과 을유생(乙酉生)의 두 형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호(法號)는 경선(慶船)이다. 경기지역 화승들의 주된 근거지인 남양주 흥국사에서 은봉신경(隱峰信瓊)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응석의 작품 중 9점이 흥국사에 봉안되었고 그의 초기 작품들이 대부분 흥국사 인근 사찰에 봉안된 점으로 미루어 흥국사를 중심으로 활동영역을 넓힌 것으로 보인다. 흥국사와의 인연은 지속되었는데 1889년 만월보전 중수 시에는 불량(佛糧)을 헌답(獻畓)했고, 1890년 시왕전(十王殿) 중수를 기록한 현판에는 대중겸화주질(大衆兼化主秩)에 금곡영환에 이어 경선응석이 기록되어 있어 화주로서의 역할도 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말년에는 인근의 의정부 회룡사(回龍寺)에 머물렀다. 응석의 첫 작품은 1853년에 보조화승으로 참여해 제작한 남양주 봉영사 아미타불도이다. 그런데 보조화승으로 참여한 작품이 5점 밖에 되지 않아 일찍부터 수화승의 반열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1859년 문경 대승사의 신중도 조성 때부터 수화승으로 불화 제작을 이끌었고 이후 많은 사찰의 불화 제작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그의 화적을 이은 화승의 계보는 보이지 않는다.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화승은 흥국사의 금곡영환이다. 금곡영환과는 수화승과 보조화승의 역할을 때에 따라 나누어 맡아가며 불사를 수행하였다. 응석은 같은 시기에 활동하던 화승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 불화의 뿌리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남긴 불화를 주제별로 살펴보면 괘불 5점, 여래도 11점, 지장보살도 5점, 칠성도 5점, 십육나한도 4점, 신중도 17점으로 다양하다. 출초(出草: 불화의 초본을 제작하는 일) 또한 7점의 초본을 남겼는데, 특히 동국대학교 소장 신중도 초본(1859)은 이후 그가 다른 신중도를 제작하는 데 있어서 모본이 되었다. 개운사 대웅전 지장시왕도(1870)와 미타사 칠성도(1874)는 다른 사찰의 불화 조성 때 사용된 바 있다. 응석은 봉은사 판전 비로자나불도(1866)와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1891)도 출초했는데 조선 말기에 거의 조성사례가 없는 비로자나불도를 출초를 했다는 점에서 화엄신앙과 비로자나불도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점은 모두 왕실과 관련된 불화이다. 남겨진 그의 작품을 통해 볼 때 1853년에서 1912년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심 활동 지역은 현재의 서울과 경기 지역이지만, 예천 반야암 신중도( 1859)를 비롯해 문경 반야암 신중도(1859), 해남 대흥사 약사불도(1901) 제작 등 전국적으로도 활약하였다. 그는 출초를 새롭게 해 새로운 도상을 조성했지만 채색은 원색의 짙은 남색·붉은 색·녹색의 색채 대비가 두드러지는 등 일부 구름이나 인물의 얼굴표현에 나타난 바림질을 제외하고는 소극적으로 음영법을 사용하였다. 한편 응석은 사찰의 중수자와 화주로서도 활약하였다. 1881년 김순항(金淳恒)이 쓴 「학림암중수기(鶴林庵重修記)」에 의하면 양주 불암산에 소재한 황폐해진 학림암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영성(影惺)과 경선이 판관 하도일(河道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하도일의 주선으로 왕실에서 천금을 하사받아 절을 중수했다고 한다. 응석은 왕실 관련 불사를 하면서 왕실과 인연 관계를 맺었는데 이러한 배경이 학림암의 중수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