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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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단체
1961년 2월 21일,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며 조직 구성을 추진했던 통일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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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61년 2월 21일,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며 조직 구성을 추진했던 통일운동단체.
내용

1960년 4월 혁명 이후 혁신계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통일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통일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1960년 9월 ‘민족자주통일(약칭 민자통)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 조직은 1961년 1월, 4개 혁신정당과 통일운동 관련 대부분의 단체, 피학살자유족회 등 혁신세력들을 결집하여 1,000여 명에 이르는 준비위원의 명단과 강령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민자통의 정식 출범 직전 구체적인 통일방안에 대한 문제로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통일사회당 관계자들은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며 민자통 정식 결성 이전에 통일방안을 확정지을 것을 요구하였지만, ‘중립화’보다 ‘민족 자주’를 앞세웠던 민족건양회와 사회당은 우선 조직을 먼저 결성하고 추후 조직 내부에서 통일방안을 결정하자고 맞섰다.

결국 중립화 통일을 주장했던 통일사회당 세력은 1961년 2월 21일 민자통을 탈퇴하고, 삼민당, 광복동지회, 천도교·대종교 인사 일부와 함께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약칭 중통련) 발기주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중통련은 1961년 3월 6일 민자통의 민주, 자주, 평화의 개념적 통일론을 비판하고, 통일 원칙이 분명하지 않으면 ‘공산주의자의 편승’과 ‘보수 정권의 반동화’를 초래하여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파괴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발기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면서 중통련의 발기 목적이 중립화 통일의 뚜렷한 통일 방안과 원칙을 앞세워 민족운동의 역사적 거보를 내딛는 데 있다고 밝혔다. 또한 중통련은 3월 말까지 약 500여 명으로 구성되는 결성준비위원회를 정식으로 구성하고, 도 단위 지방 조직을 마친 후 4월 초 정식으로 발족할 것이라는 계획도 내놓았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날 때까지 결성준비위원회 구성과 지방조직 결성을 완료하지 못하였다. 또한 중통련은 영세중립화를 위한 500만 서명운동을 벌이겠다는 계획도 세웠으나 역시 실행하지 못하였다. 다만 종종 성명서를 발표하고, 통일사회당이 주최하는 시국강연회에서 중통련 대변인 김기철(金基喆)이 중립화 통일론을 강연하는 수준의 활동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중통련은 독자적인 조직 기반과 활동력을 갖는 통일운동단체라기보다는 사실상 통일사회당의 외곽단체로서 기능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주화운동사』1(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돌베개, 2008)
『통일문제와 정치·사회적 갈등: 1953∼1961』(홍석률,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4·19와 남북관계』(한국역사연구회 4월민중항쟁연구반, 민연, 2000)
집필자
오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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