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거(伯居), 호는 사시자(謝施子) 또는 몽예(夢囈)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 구만(九萬)이고, 아버지는 처사 학명(鶴鳴), 어머니는 이항복(李恒福)의 증손녀이다.
1708년(숙종 34) 20세에 소과(小科)에 급제하였으나, 중병(重病)이 들어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서 유폐(幽閉) 생활을 하였다. 이후 일체의 사회 활동을 하지 못하고 독서와 저작에만 몰두하였다. 1713년의 마지막 날, 자신의 원고를 정리하여 스스로 문집을 만들고, 그 이듬해인 3월에 26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소론(少論)의 영수로 활약한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손자로서 뛰어난 문재와 학식으로 어린 시절부터 촉망받는 인재였으나, 중병으로 인해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병상에서 오로지 독서와 사색만으로 시간을 보냈고, 그 결실을 저서 한 권으로 남겼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일반적인 문집과 달리 의례적인 글이 거의 없고, 자신의 관점을 명확히 드러낸 학술 비평과 한시로 이루어져 있다. 만여 권에 이르는 집안의 장서를 섭렵하고 제출한 그의 독창적인 주장들에서 당시 조선 지성사의 한 단면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소재로 한 「속동도악부(續東都樂府)」를 지었고, 우리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중국과 비교하여 분석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또한 중국의 전통 역법(曆法)이 더 우수하다는 당시의 논의에 대한 반론을 써서 서양 역법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서양의 학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문집에 포함된 만록인 『사시자(謝施子)』에 천문역법과 역사평론, 언어문자학, 문학평론, 서법, 인물평 등이 항목별로 서술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정제두(鄭齊斗, 1649년∼1736)와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교유에 참여하여 주희(朱熹)의 경서 해석에 대한 비판을 접하였으며, 그의 학문적 관심은 당시의 주류였던 주자학(朱子學)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하게 펼쳐졌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김창협(金昌協, 1651∼1708) 등 노론(老論)계를 대표하는 학자와 문인들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유성룡(柳成龍, 1542∼1607)·허목(許穆, 1595∼1682)·박세당(朴世堂, 1629∼1703) 등 소론과 남인(南人)계 인물을 극찬함으로써 후대의 논란을 빚기도 했으나, 예리한 분석과 탁월한 식견으로 또 하나의 시각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