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명작가』는 18세기 전반 창원 황씨(昌原黃氏) 집안의 누군가에 의해 필사된 고시조집이다. 78수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고, 『청구영언(진본)』 이전 시조집의 존재 형태를 보여 준다.
이 시조집은 충청남도 아산시 인근의 창원 황씨 집안에서 발견된 서책에 포함되어 있었다. 박물지에 가깝게 여러 잡다한 내용이 포함된 서책을 해철하여 뒷면에 기록한 내용 중에 『고금명작가』가 수록되어 있었다. 『고금명작가』에는 필사자나 필사 시기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다만, 서책의 지질이 숙종조에서 영조조 초기에 사용된 황색 고정지(藁精紙)이고, 내용 중에 ‘황씨’ 성의 이름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또한 서책에 기록된 열성 휘(諱)가 영조에서 끝나고, ‘주상전하(主上殿下) 경종(景宗)’ ‘금상전하(今上殿下)’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경종과 영조의 교체기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조 작품 78수는 대체로 시대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고금명작가』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를 기준으로 과거의 작품부터 당대의 작품까지를 대상으로 편집하였다. 여말선초 작품에서 시작하여 18세기 초엽까지 살았던 이언강(李彦綱, 1648∼1711)의 시조 작품이 가장 늦다. 또한 여말선초의 시조에는 충절이나 연군, 애국정신이나 사대정신과 같은 정치적 성향이 강하고, 후대에는 이별이나 연모, 인생무상이나 자연 친화적인 내용들이 많다. 그 밖에 중국의 악부를 시조로 바꾼 작품들도 있다. 다른 시조집에 수록되어 있는 동일 시조와 비교해 보면, 한자를 피하고 국문 위주의 표기법을 고수하고 있고, 표기에서도 17세기 후반∼18세기 전기의 국어학적 특징을 보여 준다. 또한 형식이나 체제를 갖추어 편찬한 『청구영언(진본)』이나 『해동가요』와는 달리 악곡명, 연대, 작자명 등을 적지 않고 시조 작품만 자유롭게 필사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청구영언(진본)』 이전에 우리의 시조집이 어떤 형태로 존재해 왔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고금명작가』는 영·정조 대에 필사된 것이 분명하지만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다. 이 필사본의 원본이 되었을 본래의 『고금명작가』는 그보다 더욱 앞설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1728년에 편찬되어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다는 『청구영언(진본)』에 비견되거나 1763년에 나온 『해동가요』보다 무려 30여 년이 앞설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