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사립경성유치원은 1913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친일 관료와 매판자본가 자제를 위한 ‘귀족 유치원’으로서의 유아교육기관이다. 한일 합병 조약 이후 이완용 등 친일 관료와 조진태 등 매판자본가들은 ‘일본어 만능 시대’에 부응하는 사립경성유치원을 설립·운영하였다. 원장은 구와바라 고이치, 보모는 교구 사다코, 조수는 장옥식이 맡았다. 30명 원아를 모집한 가운데 개원하였다. 수업도 철저하게 일본어로 실시하는 등 일본 문화나 생활양식 등이 그대로 원아들에게 주입되도록 하였다. 사립경성유치원은 1920년대 어느 시점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정의
1913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친일 관료와 매판자본가 자제를 위한 ‘귀족 유치원’으로서의 유아교육기관.
개설
설립목적
연원 및 변천
기능과 역할
현황
| 연도 | 학급수 | 보모와 조수 | 원아수 | 경비(엔) | ||
|---|---|---|---|---|---|---|
| 남 | 여 | 계 | ||||
| 1913 | 1 | 2 | 23 | 7 | 30 | 2,617 |
| 1914 | 2 | 3 | 26 | 10 | 36 | 1,985 |
| 1915 | 2 | 3 | 36 | 4 | 40 | 1,930 |
| 1916 | 2 | 3 | 32 | 8 | 40 | 1,797 |
| 1917 | 2 | 3 | 40 | 9 | 49 | 2,062 |
| 1918 | 2 | 3 | 48 | 6 | 54 | 2,289 |
| 〈표 1〉 경성유치원 현황 | ||||||
설립 초기에는 원아 수에 비하여 운영비가 대단히 많았다. 식민지화의 지속은 원아 수 증가로 이어져 개원 초기 30명에서 5년만에 54명으로 늘어났다. 1914년부터 조수 1명이 추가되었으나 구체적인 인물은 파악할 수 없다. 경성관립고등여학교장 구와바라 고이치는 여전히 유치원 원장, 교구 사다코는 폐원될 때까지 보모를 맡았다. 사립경성유치원은 1920년 이후 기록이 보이지 않아 1920년대 어느 시점에서 폐지된 것으로 보이는데, 폐지 원인이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유치원 유희창가 연구』(박혜리나, 민속원, 2014)
- 『부산교육50년사』(리진호 역, 지적박물관, 2009)
- 『일제하 유아보육사 연구』(이윤진, 혜안, 2006)
-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유치원83년사』(이숙희, 양서원, 1999).
- 『해방 전 한국의 유치원』(이상금, 양서원, 1995)
- 『한국 근대 유치원 교육사』(이상금, 이화여대출판부, 1987)
- 「덕혜 옹주가 다닌 유치원과 초등학교」(이충렬,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김영사, 2011)
- 「중앙유치원의 근대 유아교육사상 위상」(김형목, 『중앙사론』 32, 한국중앙사학회, 2010)
- 「1910년대 동화정책과 사립경성유치원」(김형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 28,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2001)
- 「1910년대 유치원 현황과 설립 주체」(김형목, 『실학사상연구 』 21, 무악실학연구회, 2001)
- 「解放前の韓國における幼稚園敎育-1897年-1945年」(柳綏美, 『京都女子大學敎育學科紀要』 42, 京都女子大學敎育學會,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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