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경성유치원 ()

근대사
단체
1913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친일 관료와 매판자본가 자제를 위한 ‘귀족 유치원’으로서의 유아교육기관.
이칭
이칭
경성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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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3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친일 관료와 매판자본가 자제를 위한 ‘귀족 유치원’으로서의 유아교육기관.
개설

한일합방 이후 본격적인 일본인의 한반도 이주와 더불어 이들 자제 교육을 위한 각종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또한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교육 사업도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유치원 설립을 도모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이완용(李完用) · 조중응(趙重應) · 민병석(閔丙奭) · 예종석(芮宗錫) 등 친일 관료와 조진태(趙鎭泰) · 백완혁(白完赫) · 한상룡(韓相龍) · 안순환(安淳煥) 등 매판자본가를 중심으로 ‘일본어 만능 시대’에 부응하는 사립경성유치원을 설립 · 운영하였다.

설립목적

강제 병합 이후 친일 관료나 매판자본가 등은 식민정책에 편승하는 일환으로 ‘일본인화’를 도모했다. 조선 총독은 유치원 설립에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립경성유치원규칙」 중 “발기인 자격은 기금 100원 이상을 기부한 자로 한정한다(제6조). 단 경성유치원 설립 후 새로 창립자로서 가입을 원하는 자는 평의원 의결을 거친 후 200원 이상의 기부금을 납부한 자로 제한한다(제7조).” 등에서 소수 특권층과 동화교육(同化敎育)을 위한 유치원임을 알 수 있다. 일어와 일본인의 풍습 등을 배워 장차 원아들로 하여금 일제 문물에 익숙한 ‘일본인화’에 중점을 두었다.

연원 및 변천

유치원 설립의 실무 기구는 사립경성유치원설립임시사무소로, 실무자는 조중응․예종석 등이었다. 원장은 관립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장인 구와바라 고이치(桑原護一)이 겸임하며, 보모는 일본인 교구 사다코(京口貞子), 조수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장옥식(張玉植)이 맡았다. 개원식은 30명 원아를 모집한 가운데 1913년 4월 7일 경성관립고등여학교에서 개최되었다. 대부분 원아는 4∼5명의 유모․하인 등과 함께 등원하였다. 이듬해 5월 11일 유치원 건물 신축과 동시에 관인방 원동(園洞)으로 이전하였다. 입학식 · 졸업식에는 친일파 · 경기 도지사 · 경성부윤 · 정무총감 등이 참석했다. 특히 1920년 수료식에 참석한 이완용과 경기 도지사 송영(松永) 등은 “동화 교육에서 기대 이상의 호성적(好成績)을 거두었다”고 관계자들을 치하하였다.

기능과 역할

유치원은 오전 9시에 등원하여 오후 2시에 귀가하는 일과였다. 원아들에게 집단 급식을 통해 일본식 예절을 교육하였다. 원아들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로 인사하거나 일본식 생활 예절을 습득했다. 수업도 철저하게 일본어로 실시하는 등 일본 문화나 생활양식 등이 그대로 원아들에게 주입되었다.

현황

1918년까지 원아 수 · 보모 수 · 운영비 등은 〈표 1〉과 같다.

연도 학급수 보모와 조수 원아수 경비(엔)
1913 1 2 23 7 30 2,617
1914 2 3 26 10 36 1,985
1915 2 3 36 4 40 1,930
1916 2 3 32 8 40 1,797
1917 2 3 40 9 49 2,062
1918 2 3 48 6 54 2,289
〈표 1〉 경성유치원 현황

설립 초기에는 원아 수에 비하여 운영비가 대단히 많았다. 식민지화의 지속은 원아 수 증가로 이어져 개원 초기 30명에서 5년만에 54명으로 늘어났다. 1914년부터 조수 1명이 추가되었으나 구체적인 인물은 파악할 수 없다. 경성관립고등여학교장 구와바라 고이치는 여전히 유치원 원장, 교구 사다코는 폐원될 때까지 보모를 맡았다. 사립경성유치원은 1920년 이후 기록이 보이지 않아 1920년대 어느 시점에서 폐지된 것으로 보이는데, 폐지 원인이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의의와 평가

모래장난에 열중이던 원아들은 기미가요가 들려오자, 일제히 기립하여 이를 제창하였다. 일본어 교육을 통한 생활과 풍습 익히기는 유치원의 주요한 일과였다. 발기인의 망년회나 보모․원장 등과의 간담회는 유치원을 통한 사회 활동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사립경성유치원은 특히 식민지 동화정책에 부응하여 일본인화를 획책한 유치원이었다.

참고문헌

『유치원 유희창가 연구』(박혜리나, 민속원, 2014)
『부산교육50년사』(리진호 역, 지적박물관, 2009)
『일제하 유아보육사 연구』(이윤진, 혜안, 2006)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유치원83년사』(이숙희, 양서원, 1999).
『해방 전 한국의 유치원』(이상금, 양서원, 1995)
『한국 근대 유치원 교육사』(이상금, 이화여대출판부, 1987)
「덕혜 옹주가 다닌 유치원과 초등학교」(이충렬,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김영사, 2011)
「중앙유치원의 근대 유아교육사상 위상」(김형목, 『중앙사론』 32, 한국중앙사학회, 2010)
「1910년대 동화정책과 사립경성유치원」(김형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 28,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2001)
「1910년대 유치원 현황과 설립 주체」(김형목, 『실학사상연구 』 21, 무악실학연구회, 2001)
「解放前の韓國における幼稚園敎育-1897年-1945年」(柳綏美, 『京都女子大學敎育學科紀要』 42, 京都女子大學敎育學會,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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