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구파배우조합 ()

근대사
단체
1915년 3월 26일 전통 예인들이 자신들의 이익 대변과 공연을 목적으로 조직 · 활동한 경성부(京城府) 훈정동(薰井洞)에 위치한 조합.
이칭
이칭
조선구파배우조합(朝鮮舊派俳優組合), 구파배우조합
정의
1915년 3월 26일 전통 예인들이 자신들의 이익 대변과 공연을 목적으로 조직 · 활동한 경성부(京城府) 훈정동(薰井洞)에 위치한 조합.
개설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은 구파배우조합(舊派俳優組合), 조선구파배우조합(朝鮮舊派俳優組合)이라고도 한다. 개항 이후 근대시기 전통 예술을 담당하였던 예인들은 새로운 사회 환경에서 적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02년 광대와 기생들로 조직된 관립 흥행 회사 성격의 협률사(協律社)가 설립되어 희대(戲臺)에서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를 설행하는 등 예인들의 조직체가 구성된 바 있다. 이후 서양식 극장들이 앞 다투어 서울에 들어섰는데, 당시 광무대(光武臺), 연흥사(延興社), 단성사(團成社) 등 극장 무대에는 협률사에 참여하였던 여러 광대와 기생들의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며 새로운 공연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설립목적

경성구파배우조합의 설립 목적은 1915년 3월 26일 정식 사무 분장을 시작한 날 당시 조합장이었던 강재욱이 “장ᄅᆡ에 아모죠록 졍신을 찰여 남의 치욕을 면ᄒᆞ고 잘 슈신ᄒᆞ야가미 조합 발젼의 긔쵸”라고 언급한 것으로부터 살펴볼 수 있다. 즉, 새로운 사회 환경에서 스스로 자신들의 예인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조합 활동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설립 취지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경성구파배우조합은 1900년대 초 광무대와 연흥사 두 극장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전통 예인 28명이 모여 3월 26일 김창환·이동백을 선생으로, 장재옥을 조합장으로, 김인호·김봉이를 부조합장으로, 조양운·한문필 등을 총무로, 관천희를 사찰로, 윤병두를 장리로 하여 사무 분장을 단행하였다. 하지만 이후 6월에는 조합장이 장재옥이 아니라 강경수로 대치되었고, 총무는 조진영·박상도로 바뀌었으며, 사찰을 보던 관천희는 평의원으로 되는 등 조직에 변화가 일어났다.

구파배우조합에 소속되어 있던 광대들 중 일부는 단독으로 협률사를 조직하여 지방 순회를 다니는 등 초창기 구파배우조합 내에 여러 분쟁이 있었으나, 이후 가을에 진행될 ‘축시정오주년기념물산공진회’(祝始政五年紀念物産共進會)에 대대적으로 참여하여 흥행을 할 목적으로 단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경성구파배우조합은 ‘물산공진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인원을 대폭 확충했다. 공연 광고를 통해 살펴보면 확장된 인원은 60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그 명칭을 ‘조선구파배우조합’이라 했는데, 이는 경성구파배우조합에 소속되지 않은 다른 배우들을 참여시키면서 임시변통으로 사용한 명칭이다.

‘물산공진회’에서는 심청가, 수궁가, 춘향가, 삼국지연의, 박타령 등과 같은 판소리 5바탕을 창극으로 공연했고, 이외에도 영남루(嶺南樓), 삼남교자(三男敎子), 황공자극(黃公子劇), 효양가(孝養歌), 수호지연극(水湖誌演劇), 금태자연의(金太子演義), 황학루 이삼극(黃鶴樓二三劇) 등 새롭게 창작된 창극 또한 공연하였다. 그리고 오동봉황무(梧桐鳳凰舞), 무용호접무(芙蓉胡蝶舞), 쌍고사승무(雙鼓四僧舞), 전뇌별검무(電雷別劍舞), 창부별가무(唱夫別歌舞), 죽림칠현무(竹林七賢舞) 등의 가무 공연도 있었다. 이외에도 좌창(坐唱), 승도(繩渡), 쌍가야금(雙伽倻琴), 지재(地才), 수심가(愁心歌), 입창(立唱), 육자가(六字歌), 조타령(鳥打鈴), 중타령[僧打鈴], 배따라기 등의 종목도 공연되었다.

‘물산공진회’ 공연이 50여 일간의 여정을 끝낸 후, 참여하였던 경성구파배우조합은 이제 구파극이 아니라 새로운 신파극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이후 배우조합의 주 무대였던 단성사가 영화 전용관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이에 따라 경성구파배우조합도 자구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일본인 전문가를 초빙하여 신파극 연출에 대한 제반 사항을 습득하고, 김도산(金陶山) 일행이 조합 안에 신파개량단을 조직하여 새로운 공연을 창작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개량신파극으로 <장화홍련전>이 있었다.

그러나 물산공진회 이후 구파배우조합은 별다른 활동을 진행하지 못했다. 1925년 7월 29일 이동백, 심정순, 김창룡 세 명창이 수해이재민을 구제할 목적으로 구파조합원 명의의 공연을 진행한 것이 보일 뿐 조선구파배우조합의 활동은 뚜렷하게 기록된 것이 없다.

기능과 역할

경성구파배우조합은 음악, 무용, 연희 등 전통적인 공연예술 종목을 계승하여 새로운 서양식 무대 등을 통해 공연하여 왔으며, 근대기에 새롭게 시도된 분창 형식의 판소리인 창극의 전승, 개량,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바 있다. 이들은 신연극을 도입하여 구파극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1910년대 새롭게 형성된 대중(大衆)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공연예술 문화를 주도하였다.

의의와 평가

경성구파배우조합은 1902년 조직된 관립 흥행 회사 성격의 협률사의 뒤를 이어, 전통 공연 예술인들이 스스로 조직한 최초의 전문적인 근대 공연 예술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체는 비록 1920년대 중반 이후 사라졌지만, 조합에 속해 있던 많은 공연 예술인들이 이후 유사한 형태의 단체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조선성악연구회 등의 설립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1915년 일제가 조선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설행한 물산공진회에 참여하여 이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취하고자 적극적으로 활동을 진행한 점은 오점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한국근대음악사회사』(권도희, 민속원, 2004)
『한국창극사연구』(백현미, 태학사, 1997)
『한국근대연극사』(유민영,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6)
「조선구파배우조합(朝鮮舊派俳優組合) 시정오년기념(始政五年紀念) 물산공진회(物産 共進會) 참여의 음악사적 고찰」(이진원, 『한국음반학』 제13호, 한국고음반연구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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