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강화도 외성 수비를 담당하던 사찰이다. 용진진의 남쪽 해안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있었으며, 예로부터 용당제월(龍堂霽月: 용당사 비 갠 하늘의 밝은 달)이라 하여 강화도 팔경(八景) 중 하나였다. 사찰이 위치한 용진진에는 병마만호(兵馬萬戶) 휘하에 101명의 병력이 주둔해 있었고, 그 남쪽에는 ‘참경루(斬鯨樓: 고래 잡는 누각)’가 있었는데, 여기서 고래는 청나라 군대를 의미한다고 한다.
용당사(龍堂寺)는 강화도 좌강돈대와 용강돈대 사이 해안도로 인근에 있었던 사찰로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다. 이 사찰은 강화 외성의 수비를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창건된 승병(僧兵) 거주 사찰이었다. 『비변사등록』에 의하면, 1692년(숙종 18) 9월 14일에 강화유수 오시대(吳始大)가 올린 장계(狀啓)에서 이르기를, “병조판서 민종도(閔宗道)의 품달로 사찰을 짓고 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완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초에 승공명첩(僧空名帖: 승려에게 주는 공명첩)이 30여 장뿐이었고, 현재 다시 재력이 부족하니 승공명첩 수십 장을 더 얻어 판매한다면 그 재력으로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이 이미 시작한 공사여서 승공명첩을 더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아뢰었고, 숙종은 승공명첩 20장을 만들어 주라고 하교하였다. 이렇게 해서 완공된 용당사는 160칸 규모였다. 이때 용당사를 지은 땅이 송식(宋植)의 소유였으므로 그에 맞는 땅값을 보상해주었다. 그런데 1738년(영조 14) 11월 2일에 강화유수 권시적(權示啇) 등이 장계에서 아뢰기를, “갑곶(甲串) 아래 용당사(龍堂寺) 앞에 있는 참경루는 승려들이 수호하였었는데 지금은 지키는 승려가 없어 무너지고 퇴락하였습니다. 다시 2백 장의 공명첩을 얻어 판매한 재력으로 수리하고, 또 남는 재력으로 정족산성의 부서진 승사(僧舍)를 수리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영조는 공명첩의 폐단을 이유로 1백 장으로 줄여 허락하였다. 사찰이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 제천단(祭天壇) 서쪽 절벽 아래에도 같은 이름의 용당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권상로(18791965)가 찬술한 『한국사찰전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시를 새긴 현판이 있었으며,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제천단에서 제사 지낼 때 용당사에서 숙박하였다. 명종은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에게 제천단의 초사(醮詞)를 짓도록 명하였다. 이 절은 1883년(고종 20) 이후 폐사되었으며 용당사에 있던 작은 금불상이 전등사에 옮겨져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