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전주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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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정개혁안」은 1894년 6월 동학농민군이 초토사 홍계훈에게 화약의 조건으로 제시한 폐정개혁에 관한 문서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동학농민운동 전 기간에 걸쳐 제시된 개혁안을 모두 일컫는다. 봉기 초부터 전주화약 때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폐정개혁안이 제시되면서 농민의 요구가 구체화되어 갔다. 봉기의 원인이 되었던 탐관오리의 숙청·매관매직 등 정치기강 문란의 시정에서부터 농민에 대한 탄압과 가렴주구 철폐, 신분상 모든 차별대우 철폐, 일본 침략에 내통하는 자 징계,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통한 농민의 생계 보장 등 반봉건적·반침략적 내용을 담고 있다.
폐정개혁안 (弊政改革案)
「폐정개혁안」은 1894년 6월 동학농민군이 초토사 홍계훈에게 화약의 조건으로 제시한 폐정개혁에 관한 문서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동학농민운동 전 기간에 걸쳐 제시된 개혁안을 모두 일컫는다. 봉기 초부터 전주화약 때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폐정개혁안이 제시되면서 농민의 요구가 구체화되어 갔다. 봉기의 원인이 되었던 탐관오리의 숙청·매관매직 등 정치기강 문란의 시정에서부터 농민에 대한 탄압과 가렴주구 철폐, 신분상 모든 차별대우 철폐, 일본 침략에 내통하는 자 징계,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통한 농민의 생계 보장 등 반봉건적·반침략적 내용을 담고 있다.
전봉준은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1855년(철종 6)에 태어나 1895년(고종 32)에 사망했다. 35세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1894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고,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여 동학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시정개혁에 전념하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했다. 남도접주로서 12만 농민군을 지휘하며 싸우다가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고, 피신 중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봉준 (全琫準)
전봉준은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1855년(철종 6)에 태어나 1895년(고종 32)에 사망했다. 35세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1894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고,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여 동학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시정개혁에 전념하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했다. 남도접주로서 12만 농민군을 지휘하며 싸우다가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고, 피신 중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정청은 1894년(고종 31) 6월 내정 개혁을 위해 한시적으로 설치되었던 임시 관청이다. 1894년 동학농민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이 체결된 후 농민군이 철수하자 수습을 위한 논의가 본격화되어 내정 개혁을 위한 교정청이 임시기구로 설치되었다. 교정청은 일본측에 군사 철수와 내정 개혁 간섭 중지를 요구하고,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입안한 12개 조항의 개혁내용을 공표하였다. 하지만 친일개화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며 내정을 추진하고자 했던 교정청은 폐지되고 그 역할은 군국기무처로 넘어갔다.
교정청 (校正廳)
교정청은 1894년(고종 31) 6월 내정 개혁을 위해 한시적으로 설치되었던 임시 관청이다. 1894년 동학농민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이 체결된 후 농민군이 철수하자 수습을 위한 논의가 본격화되어 내정 개혁을 위한 교정청이 임시기구로 설치되었다. 교정청은 일본측에 군사 철수와 내정 개혁 간섭 중지를 요구하고,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입안한 12개 조항의 개혁내용을 공표하였다. 하지만 친일개화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며 내정을 추진하고자 했던 교정청은 폐지되고 그 역할은 군국기무처로 넘어갔다.
1891년 7월부터 1903년 4월까지 박기현이 전라남도 강진의 향촌생활을 중심으로 작성한 일기.
강진강재일사 (康津剛齋日史)
1891년 7월부터 1903년 4월까지 박기현이 전라남도 강진의 향촌생활을 중심으로 작성한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