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허난은 고구려의 유민 뿐만 아니라 다른 부락 · 부족들의 사민(徙民)을 받아들인 지역이다. 당나라 초기부터 대대적으로 실시된 사민정책(徙民政策)이 이때 다시 추진되었다.
특히, 북방의 강국인 돌궐(突厥)은 묵철(默啜)의 치세에 이르러 강성하여져 그 세력범위가 급속히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는 정치가 혼란해져 예속촌의 추장이 당나라로 투항하였고, 서쪽의 돌궐 10성(姓)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힘의 공백기를 맞아 일시에 당나라의 기미정책에 순응해서 당나라로 항복해가는 자가 많았다.
715년 십성부락좌상 오돌육철(十姓部落左廂五咄六啜), 우상 오노실필오기근(右廂五弩失畢五俟斤)과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 고문간(高文簡) 등이 무리를 이끌고 각각 투항하였을 때, 고구려 유민의 대추(大酋) 고공의도 뒤따라 당나라에 입거(入居)하였다.
그리하여 그 무리가 전후 총 만여장(萬餘帳)이나 되었다. 이들은 모두 허난(河南)에 받아들여져 사거(徙居)하게 되었다. 이때 당나라는 고문간에게 좌위대장군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