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 고사계(高舍鷄)의 아들이다. 당나라의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 ·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를 지냈다. 그래서 그를 하서 혹은 안서 출신의 고구려 후예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근거는 고구려 유민이 사막곡(沙漠曲)으로 많이 유입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는 자료로는 ≪구당서≫ · ≪신당서≫와 ≪자치통감≫ 등이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 고선지전에는 그를 명확히 고구려인이라 하였고, ≪구당서≫와 ≪자치통감≫에는 선임 안서절도사 부몽영찰(夫蒙靈詧)이 고선지가 세운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개똥 같은 고구려 놈’이라고 욕을 했다는 내용이 있다.
호삼성(胡三省)이 ≪원화성찬 元和姓纂≫에 의한 주(注)를 단 것을 보면, ‘부몽(夫蒙)’이라는 성(姓)은 본래 서강인(西羌人)이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중국에 동화된 이민족 사이에서 상대방을 업신여기고 욕할 때, 한화(漢化)의 정도를 기준으로 종족적 멸시를 표현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한 예가 호장(胡將) 안록산(安祿山)과 가서한(哥舒翰) 사이에서도 보인다.
이와 같이, 고선지는 한화된 호장이나 주변인으로부터 시기를 받을 만큼 빛나는 전적(戰績)을 세웠다. 마지막 참형을 당하였을 때도 그 배후에는 그에 대한 시기가 깔려 있는 듯하다.
≪신당서≫ 권135에는 그의 용모가 말쑥하고 수려하여 무장답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사계는 그가 유완(儒緩)한 것에 대해 늘 근심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데 영민하고 도량이 넓으며 용감하여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하서군(河西軍)에 예속되어 중급 장교로 있다가 사진교장이 되었다. 20여 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안서로 갔다. 거기서 아버지가 세운 음공(蔭功)을 입어 유격장군이 되었으나 곧 아버지와 같은 반열에 섰다고 하며,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모두 그를 보통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안서군에 있을 때, 절도사 전인완(田仁琬)과 개가운(蓋嘉運)은 그가 장차 큰 재목이 될 것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뒤 부몽영찰에 의하여 여러 차례 발탁되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되었고, 개원(開元) 말에 이르러 병력 2,000을 거느리고 톈산 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가 되었다가, 곧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가 되었다. 때문에 기록은 그에 관한 초기의 사적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47년 소발률국(小勃律國 : Gilghit)을 원정하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즉, 747년 토번(吐蕃 : 티베트)과 사라센 제국이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팽창하던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진하자, 그는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발탁된다.
토번족 정벌이라는 임무를 띤 그는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오식닉국(五識匿國 : 지금의 Shignan 지방)을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토번족의 군사기지인 연운보(連雲堡)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계속 진격하여 험난하기로 이름난 힌두쿠시 준령을 넘고 소발률국의 수도 아노월성(阿弩越城)을 점령한 후, 사라센 제국과의 유일한 교통로인 교량을 파괴하여 그들간의 제휴를 단절시켰다.
제1차 원정에서 불름(佛菻 : 동로마) · 대식(大食 : 아라비아) 등 72개국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사라센 제국의 동진을 저지한 공으로, 귀국하여 홍려경어사중승(鴻臚卿御史中丞)에 올랐으며 이어 특진 겸 좌금오대장군 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사라센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石國 : Tasuhkent 부근)을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으로 호송하였다. 이 공으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그러나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석국왕을 참살하자, 이에 분기한 서역 각국과 사라센은 이듬 해 연합군을 편성하여 탈라스(怛羅斯, Talas)의 대평원으로 쳐들어 왔다. 이를 막기 위하여 고선지는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제3차 원정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와의 동맹을 가장한 카를루크(葛邏祿, Karluk)가 배후에서 공격하자 패배하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탈라스 전투’이다.
제2차 탈라스 원정에서 돌아오자, 당나라 현종은 그를 다시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전임시키고 우우임군대장군(右羽林軍大將軍)에 임명하였다. 755년 밀운군공(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았다. 이 해 11월 안록산이 범양(范陽)에서 난을 일으키자,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가 되어 출전하였다.
이 때 그가 거느린 병력은 비기(飛騎) · 확기(彍騎)와 삭방(朔方) · 하서(河西) · 농우(隴右) 등의 군대였다. 여기에 증원군을 더 보충하기 위하여 경사(京師)에서 5만 명을 선발군으로 뽑아 패전한 봉상청(封常淸)과 교대하였다.
반란군이 동관으로 쳐들어 오자 본래 방어 지역인 협현(狹縣)을 무단으로 떠나 동관(潼關)으로 이동했는데,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던 부관 변영성(邊令誠)이 이 사실을 과장하여 밀고함으로써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고선지의 사적에 관한 자료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고선지 열전이 있다. 이 두 문헌을 두루 살펴볼 때, 소발률(小勃律 : 지금의 Gilghit 부근)과 안서절도사 부몽영찰과의 관계 등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가 ≪신당서≫보다 상세하다.
최근의 고선지에 대한 연구로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샤반느(Chavannes, Ed.)가 종래의 중국 문헌 이외에 새로이 서방 · 아랍 등의 문헌을 섭렵한 후 고선지가 세운 탁월한 사적을 발굴해내어 밝힌 ≪서돌궐사료 Documents Sur les Tou · Kiue Occidentaux≫가 있다. 또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 슈타인(Stein)은 고선지의 전적지를 직접 답사하였다.
이들은 모두 고선지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천재적인 전략가로 평가하였다. 또한 세계 최초로 섬유질의 제지법이 고선지에 의해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주목할 만하다. 751년 제2차 탈라스 전투에서 이들에게 잡힌 포로 중에 제지장(製紙匠)이 있었던 것이다.
고선지가 이룩한 빛나는 전과를 통하여 그는 뛰어난 지휘자로서 통솔력과 전술이 매우 탁월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① 서역 소발률국을 토벌한 것, ② 당나라와 아라비아가 석국과 탈라스 성을 쟁탈하기 위하여 싸운 격전, ③ 탈라스 전투 이후 제지법이 아라비아에 전파된 것 등은 그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우우림대장군 고선지의 주택은 장안 선양방(宣陽坊)의 서문(西門) 남쪽에 있었다. 또 영안방(永安坊)에도 별택(別宅)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