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국사주자원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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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고봉국사 주자원불
순천 고봉국사 주자원불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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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송광사에 있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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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송광사에 있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불감.
내용

불감 높이 16㎝, 너비 13.5㎝. 1972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송광사 제16대 고봉국사의 원불로 전해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얇은 동판을 짜 맞추어 만든 방형(方形 : 네모반듯한 모양) 육면체의 불감(佛龕)으로 안에 판불을 봉안하였다. 감실 부분은 두 짝의 문비(門扉 : 문짝)를 닫아 여닫을 수 있게 하였다. 윗부분에는 2단의 상형(箱形) 천개를 올렸으며, 밑부분에는 연꽃이 부조된 2단의 대좌가 받쳐져 있다.

천개의 받침 부분은 각각 5칸으로 구획하였으며, 꽃무늬와 범자(梵字)를 시문하였다. 양쪽 문비의 바깥 면에는 인왕상이 한 구씩 타출법(打出法)으로 양각되어 있다. 가는 선으로 도드라진 근육과 옷주름은 치졸하게 표현되어 사실감이 부족하다. 하지만 입을 다물거나 크게 벌린 분노형의 표정과 자세에서는 힘을 느낄 수 있다.

문비 안쪽 면에는 두건을 쓰고 보주를 든 지장보살(向左)과, 보관에 화불이 표현되고 몸 앞에서 두 손을 모아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向右)이 각각 타출되어 있다. 이 상들의 표현이나 배치는 고려 후반에 단독상의 불화로서 유행되었던 경향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들과 자세나 지물이 같은 두 보살상이 한 화폭에 표현된 특이한 고려 불화가 일본(西福寺)에 있어 흥미롭다.

감 내부에 원각상을 봉안할 공간은 없으며 삼존불과 보살 2구, 나한상 2구가 부조된 판이 뒷벽에 고정되어 있다. 간간이 용도를 알 수 없는 원형 구멍들이 뚫려 있음도 주목된다. 판의 상단에 타출된 삼존불은 두터운 잎의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정면상으로 각각 전법륜인(向左)·지권인·선정인(向右)에 가까운 손 모습이다.

향우측의 상만 우견 편단(右肩偏袒 : 오른쪽 어깨가 드러남.)의 불의를 입고 있다. 하단에는 중앙에 2구의 나한상이 합장한 모습이며, 양쪽 끝에 앉은 보살상들의 지물은 고려 불화에 자주 등장하는 여의(如意)가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삼존불은 비로자나삼신불을 표현한 듯하나 삼존상의 명칭은 단정할 수 없다. 3불의 표현은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장안사(長安寺)를 중수할 때 비로자나삼존불을 봉안한 기록으로부터 경천사탑(敬天寺塔)이나 원각사탑(圓覺寺塔), 수종사(水鐘寺) 불감의 부조 등이 있으며 고려 말 조선 초에 그 조형이 성행되었다.

이 불감에 있는 것과 같은 범자(梵字)의 표현과 함께 라마교 도상 유입의 영향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 불감의 표현은 조선 중기 이후 삼신불의 도상적 전형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단계로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타출(打出)된 상들의 형태가 자연스럽지 못하여 솜씨가 뒤지는 지방 장인의 제작으로 보인다. 키형의 광배(光背 :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나 불의의 표현, 인왕상의 형태가 조선 초의 원각사탑(1467년) 부조들과 가깝게 비교된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고봉국사의 생존 연간(1350∼1428년)에서도 말년에 가까운 시기인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제작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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