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 교회 창설 이래 지속적으로 교세를 확장해 가던 천주교회는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후 1886년, 조불수호조약(朝佛修好條約)에 의해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이 재개되면서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큰 교세를 형성했던 충청도 지역에는 1890년에 간양(間良)골과 양촌(陽村)에 파스키에(P.Pasquier, 주약슬(朱若瑟)) 신부와 퀴를리에(J.Curlier, 남일량(南一良)) 신부가 파견되었다. 주1 후, 충청도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간양골 본당과 양촌 본당은 흩어진 신자들을 모아들이는 한편, 와해한 신앙 공동체 재건의 발판이 되었다. 아울러 박해로 인해 은밀하게 순회하던 천주교회가 가시적인 곳에 주2 자신을 드러내는 교회로 바뀌게 되었다.
1895년, 제2대 주임으로 파견된 드비즈 신부(E.Devise, 성일론(成一論))는 간양골 대신 공세리로 부임하였다. 공세리는 충청도 지역의 주3을 수납하던 공세곶창(貢稅串倉), 공진창(貢津倉)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드비즈 신부는 이곳에 이미 마련해 둔 한옥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본당의 공세리 이전으로 아산만(牙山灣)에서 삽교천(揷橋川), 곡교천, 안성천(安城川)으로 이어지는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지역 전교 활동의 거점이 주4.
드비즈 신부는 이듬해 명동으로 전임되었다가 1년 만인 1897년에 재부임하였다. 곧이어 공세창 언덕 일대를 매입하고, 1899년 8월에 성벽 주변에 한옥 사제관과 성당을 건립하였다. 1905년에는 조성학당을 세워 지역의 아동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의료 지식과 약품을 이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특히 종기 치료에 유용한 주5이 유명했다.
1920년부터는 새 성당 건축이 시작되었다. 신자들의 주6가 증가하여 기존의 한옥 성당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터 닦기 공사를 시작한 지 2년여 만에 충청도에서는 처음으로 서양식 성당이 건축되었다. 드비즈 신부가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주7의 성당과 사제관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1922년 10월 8일, 드브레(E.Devered, 유세준(兪世俊)) 주교의 집전으로 주8을 가졌다. 성당의 수호자는 성 베네딕도(St. Benedictus)이다.
이후 성당은 1998년 7월 28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보다 앞서 300년 이상의 수령을 가진 느티나무 2그루와 팽나무가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된 바 있다. 공세리성당은 고풍스러운 건물과 고목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으로 주목받고 있다.
공세리성당은 박해기 이후 충청도에서 설립된 최초의 본당으로, 박해로 인해 숨어 있던 천주교회를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긴 박해의 종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성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