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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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개념
청나라 말기에 새롭게 『춘추』 해석서인 『춘추공양전』을 중시해 연구하던 학문.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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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청나라 말기에 새롭게 『춘추』 해석서인 『춘추공양전』을 중시해 연구하던 학문. 유학.
내용

19세기의 청조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열강의 침략과 여러 곳의 농민반란으로 전제체제가 흔들리고 있었다.

당시 사상계의 주도적 경향은 고전의 주석과 훈고에 치우쳐서 긴박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학문적 자세를 반성하고 현실 인식과 개혁사상으로 나타난 것이 공양학이다.

공양학의 명칭은 노(魯)나라 연대기를 공자(孔子)의 『춘추』에 대한 세 가지 해석 중에서 『공양전』을 표준으로 삼은 데서 붙여졌다. 『좌씨전(左氏傳)』은 사실(史實)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고문으로 기록되어 있고, 『공양전』과 『곡량전(穀梁傳)』은 사실의 배후에 숨은 공자의 이념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금문(今文)으로 적혀 있다.

공양학파는 고문을 부정하고 오로지 금문에만 의존하여 자유로운 해석과 새로운 이념을 대담하게 내세웠기 때문에 ‘금문학파’라고도 한다. 『공양전』에 입각한 춘추학(春秋學)의 역사적인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춘추』를 공자의 작품이라고 공언한 맹자(孟子)는 공자의 뜻이 사실의 비판을 통하여 대의(大義)와 명분(名分)을 밝히는 데 있다고 보아 왕도정치를 구상하였다.

② 그 뒤 동중서(董仲舒)에 의하여 유학이 통치이념으로 공식화되는데, 그 계기로 『공양전』의 대일통사상(大一統思想 : 최고군주를 기반으로 사회전반이 조직되어야 한다는 이념)이 마련되었다.

③ 청대의 공양학으로 역(易)의 변통이론(變通理論)과 『공양전』의 진보사관에 따라 국가통일과 제도개혁을 꾀하는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장존여(蔣存與)·유봉록(劉逢祿)·공자진(龔自珍)·위원(魏源)·강유위(康有爲)를 들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공양학의 전통이 미약하였다. 7세기 초의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도 『공양전』이 아니라 『좌씨전』이 우선적으로 채택되었다. 고려와 조선조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주희(朱熹) 자신이 오경보다 사서를 기본 골격으로 하였고, 더욱이 『춘추』에 대해서는 독립된 주석을 편찬하지도 않았기에 『공양전』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1798년(정조 22) 홍인모(洪仁謨)는 『좌씨전』만이 유행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공양전』과 『곡량전』에서 중요한 곳을 발췌하여 『춘추공곡합선(春秋公穀合選)』을 엮었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춘추』의 다른 전(傳)이 없어졌다.” 했고,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춘추』는 은공(隱公)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춘추』는 인군(人君)의 동작을 기록한 국사인데 이것은 『상서』와 짝한다.”는 하휴(何休)의 『공양소』를 긍정하고 있다.

정약용(丁若鏞)도 그의 『춘추고징』에서 『좌씨전』에만 매이지 않고, 『공양전』과 『곡량전』을 비판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그렇지만 청조 후기에 일어난 공양학의 새 기풍은 우리 나라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선의 실학은 공양학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빌리지 않고도 경사서 및 사회적 현실 속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여, 현실비판과 개혁을 위한 시무책을 광범위하게 제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대 공양학이 조선의 지성계에 끼친 영향은 학풍이 아니라, 공양학의 커다란 성과의 하나인 위원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이와 같이 청대 공양학은, 실학의 북학사상을 계승하면서 자주적 근대를 지향하던 개화사상가들이 척사위정론의 거센 반발과 쇄국하의 폐쇄적 상황에서 세계의 대세를 통찰하고 조선의 진로를 모색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대동서(大同書)』
『오주연문장전산고』
『한국의 근대사상』(강재언, 한길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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