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전통적 권위를 확인하고 기존의 질서를 고수함으로써 사회적 안정을 기할 것을 희구하는 명분이나 그 정치적 기반을 정통이라고 하며, 이와 대립해 기성 체제를 부정하고 전혀 상반되는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자가(自家)의 권익을 스스로 옹호하는 이해 집단이나 혹은 그와 같은 입장에 있는 계층을 이단이라고 부른다.
중국철학사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확립한 유교사상은 분명히 정통의 입장이었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들 가운데 특히 공맹(孔孟)을 반대해 그 이론을 비판했던 몇 개의 학파는 이단으로 간주할 수가 있다.
이단이라는 어휘가 처음으로 표기된 고전은 ≪논어≫이다. 그러나 공자(孔子)가 생존하던 시기는 아직도 제자백가의 사상이나 학문 체계가 정착되기 이전이었으므로 무엇을 가리켜서 이단이라고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문제는 공자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전혀 언급한 적이 없고, 은자(隱者)들의 역설적 설화가 ≪논어≫에 소개되어 있는 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즉, 당시 쇠퇴해 가는 주(周)나라 정치 도의를 바로잡기 위해 ‘정명(正名)’을 표방한 공자의 노력에 대해 극히 냉소적인 자세만을 취했던 일련의 철학들을 이단으로 간주했음이 틀림이 없다.
맹자(孟子) 때에 이르러 사설(邪說)과 음사(淫辭)가 더욱 횡의(橫議)하게 되자,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활동이 민중의 지지를 얻고 정통의 입장을 크게 위협하였다. 맹자 자신이 여기서 정통 수호의 사명을 통감하고 그 배척에 앞장 선 이단의 대상은 곧 양주·묵적과 허행(許行) 일파의 농가사상(農家思想)이었다.
춘추전국시대는 공자가 말하는 천하대란(天下大亂)의 시기이었다. 절대로 변개(變改)될 수 없는 것으로 믿어오던 주례(周禮)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이고, 군신과 부자간에 반목과 불신 현상이 드러났다.
본래 정통 사상의 기본 입장은 가부장의 권위를 존중하고 존왕(尊王)의 정신을 확인시키기 위해 ‘친친등쇄(親親等殺)’와 ‘선인후기(先人後己)’ 하는 자세가 요청됨에 반해, 이단의 논리는 이를 전면 부정하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서, 양주는 ‘위아(爲我)’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상하 신분 관계의 파기를 의미한다. 이는 곧 상호 불간섭과 무관심의 표현이었으며, 지배 체제에 대한 비협력과 반항의 형식이었다.
또한 묵적은 ‘겸애(兼愛)’를 표방했는데, 그것은 부권(父權)의 부정이며 가족의 해체를 의미한다. 오직 실리·배분의 공평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농가의 주장은 ‘군신병경(君臣竝耕)’의 이론이었다.
맹자에 의하면, 양주의 위아주의는 군신지의(君臣之義)를 파기하는 배리이고, 묵적의 겸애 이론은 부자의 혈연적 관계마저 경시하는 패륜으로 파악되었다. 이 모두가 전통 사회의 기존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므로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한유(韓愈)의 ≪원도 原道≫ 속에 이단이라는 개념이 의식적으로 잘 표명되어 있다. 한유에 의하면, 선진(先秦)에서의 양주·묵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당 시기에는 노불(老佛)의 지대한 영향으로 정통의 기반이 위태롭게 하였다. 따라서 노장을 비롯한 도교사상과 불교까지도 이단이라고 단정해 단호히 배척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었다.
베버(Weber,M.)도 역시 유교를 정통으로 보고 도교와 불교를 이단이라고 지칭한 바가 있다. 그러나 베버가 여기서 말하는 이단은 정통 교회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는 교설(敎說)의 총칭으로서 종교적 용어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양자(兩者)는 일월(日月)이나 천지(天地)와 같은 상관적 개념이었으며, 결코 흑백이나 선악과 같은 상호부정적 대립 개념은 아닌 것이었다. 그러나 맹자나 한유가 배척한 이단은 기존체제를 부정하고 통치 세력에 항거하던 반대 이론이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추호의 관용도 있을 수가 없던 것이 일반적인 통념으로 되어왔다.
조선의 주자학이 고려 말기로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불교와 도교를 이단시하고, 이를 배척하는 과정에서 수행한 역할은 역사 발전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특히, 정도전(鄭道傳)은 <불씨잡변 佛氏雜辨>을 통하여 불교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정연한 이론들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정치·경제적 실제 문제와 관련해 철학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권근(權近)은 기(氣)를 근원으로 파악한 노자사상이 결국 허무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심(心)을 근본으로 삼아오던 불씨가 공적(空寂)에 이르게 되었다고 반대하였다. 그리고 오직 유가(儒家)만이 이(理)의 일차성을 인식해 심과 기를 아울러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황(李滉)은 그 자신의 학문의 목적이 ‘파사현정(破邪顯正)’에 있음을 선언한 바 있다. 그가 말하는 파사의 뜻은 일체의 사교(邪敎)를 타파하는 것이며, 그 실질적 대상은 이황 자신이 주장한 주리(主理)이론과 배치되는 모든 다른 학설을 망라하고 있다. 특히, 양명학과 불교의 선학(禪學)을 비롯해 서경덕(徐敬德)·이구(李球)·이항(李恒)의 이론들을 가리킨다.
또한 현정의 의미는 조광조(趙光祖)가 이일원론적(理一元論的) 세계관에 입각해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이상을 구현하려다가 실패한 이후 계속 위축 일로에 놓여 있던 사림파(士林派)의 정통학풍을 진작시켜보겠다고 하는 운동의 표어였다.
이황이 반대하고 비판을 가하고 있었던 이단은 서경덕 일파의 기일원론적(氣一元論的) 세계관과, 불교의 주관적 관념론과도 상통되는 양명학파였다. 서경덕이 주장하는 ‘허즉기(虛卽氣)’의 이론은 몰락 귀족의 반사회적 은일주의(隱逸主義)와 부화(附和)할 수 있다고 전망되었다.
또한 양명학파의 ‘심즉리(心卽理)’사상은 불교적인 영향권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기존 질서를 위태롭게 할 서민의 저항 의식과 자유사상을 반영시킬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단호히 이를 배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인후(金麟厚)도 철저히 주자학적인 입장에 서서 주리론(主理論)이 아닌 비주자학계통의 학설을 모두 이학(異學)·이단이라고 규정, 강력히 이를 반대해 중립이나 조화를 일체 용납하지 않았다. 특히, 서경덕의 철학을 비판하고, 선학과 양명학을 사학(邪學)이라고 배척해 그 연구와 발전을 크게 억압하였다.
조선 유교사에서 이단 배척에 관한 가장 뚜렷한 기치(旗幟)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이다. 그것은 ‘정학(正學)’을 보위(保衛)하고 ‘사학(邪學)’을 거척(拒斥)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정학이란 요순(堯舜) 이래의 도통(道統)과 공·맹·정주(程朱)로 이어지는 학통으로서, 이것을 집대성한 주자학 일존주의(一尊主義)를 말한다. 사학의 내용은 노불과 양묵은 말할 것도 없이 16세기부터는 육학(陸學)·왕학(王學)에 대결하고, 또한 18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사교로서의 서학(西學), 즉 천주교를 배척하는 투쟁사 전부를 가리킨다.
한편, 유교 내부에서의 반주자학적 유파에 대한 반대 입장도 사학에 포함시킴으로써 그 투쟁과 배척의 치열함이 결코 육학·왕학에 대한 경우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기호학파(畿湖學派) 가운데 척이(斥異)하는 당파성이 가장 철저했던 인물은 송시열(宋時烈)이다. 그는 윤휴(尹鑴)가 경전의 주석에 관해 주희(朱熹)의 미비했던 점을 지적하고, 독자적 견해를 가지고 이를 보완한 일에 대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규탄한 바 있다.
또한 박세당(朴世堂)도 윤휴와 같은 한학파(漢學派)로 몰리어 모진 탄압을 받았다. 그것이 노론과 남인 사이에, 그리고 소론과 노론의 당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이 밖에도 한원진(韓元震)의 경우는 이를 주로 하는 것이 정학(正學)이며, 기를 주로 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하여 오직 이와 기만을 가지고 정학과 이단을 구별지었다.
이진상(李震相) 역시 기의 일차성을 주장하는 일체 학문을 이단이라고 비판하고, 이이학파(李珥學派)의 주기론을 배척하였다. 유형원(柳馨遠)은 불교의 허망과 비현실성을 지적, 폭로하고 생산 분야에 해독을 끼치는 사주(四柱)·관상(觀相)과 무녀(巫女), 그리고 일신·월신에 대한 제축(祭祝)까지 모두 황당무계한 것이라고 배척하였다.
이익(李瀷)은 천주교 역시 불교와 같은 환망(幻妄)함에 귀착되는 것이라고 비판을 가하였다. 또한 안정복(安鼎福)도 서학이 공자도 언급을 기피했던 괴력난신을 가지고 민심을 환망 속으로 오도하는 이단이라고 배척하였다.
한편, 홍대용(洪大容)도 왕양명의 주관적 관념론을 반대하고, 인식의 원천은 객관 세계에 있는 것이며, 거기에 우리의 감각 기관이 작용해 인식이 성립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근대 조선에서의 위정척사사상의 연원은 송시열의 존명양이사상(尊明壤夷思想)과 직결된다. 또한 그의 배청(排淸) 북벌론은 바로 주희의 반금적(反金的) 양이사상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천주교의 침투와 구미 제국의 무력 개국에 대결했던 위정척사론자들의 대응의 배경에는 정통과 이단과의 엄격한 준별(峻別), 그 상호간에 끊임없는 이념적 투쟁에 의해 단련되어온 가혹하리만큼 비타협적인 전통 유교가 있다.
고려 말에 주자학을 수용하면서 줄곧 반주자적인 이단의 이론을 대상으로 하는 위정척사운동은 근대조선의 개막과 함께 동서양간의 이념적·무력적 대결을 불가피하게 했으며, 척사의 주된 대상은 ‘양이(洋夷)’와 ‘왜이(倭夷)’로 향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것은 반천주교적 척사로부터 반침략적 양이(壤夷)로 발전하였다.
조선 말의 쇄국 양이는 그 동기가 정치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이념적인 위정척사사상의 반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항로(李恒老)는 전통 유교의 학통을 더욱 철저하게 계승하고, 양이로서의 서양 세계를 총체적인 척사 대상으로 삼아 위정 논리에 보다 이념적 정비를 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고제(高弟)인 양헌수(梁憲洙)·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 등은 근대 조선에서 외세의 압력에 대결한 척화·척사 이론으로부터 반일의병운동으로까지 발전되는 과정에 그 선도적 구실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