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문성 석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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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신대리성 전경
경주 신대리성 전경
고대사
유물
신라 중대(中代)의 석각(石刻) 자료.
정의
신라 중대(中代)의 석각(石刻) 자료.
개설

경상북도 경주시 남양면 신대리의 산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신대리성(新垈里城: 혹은 大岾城)의 축조에 동원된 여러 군현(郡縣)의 작업구간 경계 지점과 배당된 작업 거리를 외성벽 성돌의 표면에 새겨놓은 석각 자료이다.

내용

신대리성은 막연하게 관문성(關門城)의 일부분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런데 근래 조사결과로 인해 관문성은 하나의 성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즉, 치술령(鵄述嶺)에서 경상남북도의 도계(道界)를 따라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 모화리 동편에 있는 산 아래에 이르는 약 12km에 달하는 장성(長城)과, 해발 590m의 신대리의 산 정상에 있는 둘레 약 1.8km의 신대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성은 『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는 모벌군성(毛伐郡城) 혹은 문화관문(蚊火關門: 혹은 毛火關門), 문벌관문(蚊伐關門)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후대에는 이를 딴 관문성(關門城)으로 불렀다. 722년(성덕왕 21)에 일본군의 침입로를 막기 위해 원진(元眞) 각간(角干)의 지휘 아래 3만 9,262명의 역도(役徒)를 동원해 축조하였다. 현재는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일부만이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신대리성은 이보다 이른 7세기 후반에 축조된 타원형의 산성으로 4곳의 문지(門址)와 성 안에서 건물지 등이 확인된다. 장성과는 달리 동해안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개축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정확한 성의 명칭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산의 이름으로 확인된 대점(大岾)을 따서 대점성(大岾城)으로 부르거나 현재의 지명인 신대리를 따서 신대리성으로 부른다.

관문성석각은 바로 신대리성의 초축(初築)과 관련된 기록으로, 대점성(大岾城)의 남쪽 성벽 바깥 하단부 성돌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 명문이 새겨진 성돌은 10개가 확인되는데, 모두 현재의 남문지(南門址)에서 동북쪽으로 약 350m 떨어진 수구(水口)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명문은 다듬어지지 않은 성돌의 외면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대부분 하나의 명문을 하나의 성돌에 새겼지만, 돌의 상황에 따라 하나의 명문을 연접한 두 개의 성돌에 새긴 경우도 있어 전체 명문은 8개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글자의 크기는 대략 4∼6cm이며, 글씨체는 예서풍이 남아 있는 해서체 혹은 단정한 해서체이다.

명문에는 성벽 축조에 동원된 군현의 남쪽 경계와 북쪽 경계, 작업 담당 거리를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신대리성을 축조하는데 골고(骨估)·거칠산(居七山)·웅(熊)·압탁(押啄)·금경(金京)·절화(切火)·퇴화(退火)·서량군(西良郡) 등의 군현이 동원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 골고는 골포현(骨浦縣: 지금의 마산(馬山), 웅은 웅신현(熊神縣: 지금의 진해 웅천으로 추정), 거칠산은 거칠산군(居柒山郡: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 압탁은 압량군(押梁郡: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절화는 절화야군(切火也郡: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 퇴화는 퇴화군(退火郡: 지금의 경상북도 흥해), 서량군은 생서량군(生西良郡: 지금의 경상남도 울주) 등으로 비정되고 있고, 금경은 왕경인 경주로 추측된다.

이중 거칠산군·압량군·절화야군·퇴화군·생서량군은 왕경에서 가까운 삽량주(揷良州)에 소속된 군으로 금경도 왕경이 아니라 금관경(金官京: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로써 6세기 말 이래로 축성시에 군(郡)이 역역동원의 책임 행정단위 구실을 하는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골고(骨估)와 웅(熊)이다. 이 둘을 현으로 본다면 다른 곳은 군 단위로 하나의 역역집단을 구성하고 고유한 책임 공사구간을 할당 받은데 비해 이곳은 현을 단위로 역역집단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곳을 현으로 보지 않고 귀족들의 식읍(食邑)이나 왕실 직할지의 보는 견해도 있다.

의의와 평가

이 명문에는 각 군현이 맡은 담당 구역의 길이가 북쪽 경계 및 남쪽 경계와 함께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 척도(尺度)의 정확한 길이를 알 수 있다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당시의 1보(步)는 6척(尺)이고, 1척은 10촌(寸)이었으며 길이는 당척(唐尺)과 같은 약 29.4cm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동원된 군현이 담당한 작업 거리는 불균등하지만, 평균 약 6보 3척(약 11.7m)으로 추산된다. 그러므로 성벽의 둘레가 1.8km인 점을 고려하면 원래의 작업 구역은 약 150개 정도로 나뉘었을 것이고, 명문도 대략 그 정도 새겨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마멸과 후대의 보수 등에 의해 현재 8개의 명문만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작업 거리가 보·척·촌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어, 명문은 축성 완료 이후 새겨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에서 왕경 지역의 산성을 축조하거나 개축하는 데 지방민을 동원해 작업 거리를 할당하고 작업 책임을 부여했던 것은 6세기 대의 금석문 자료인「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와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에서 잘 나타난다. 그런데 이들보다는 시기가 떨어지는 이 명문에 의해 통일신라기에도 왕경 지역 산성의 축조가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통일기(統一期)의 귀족사령(貴族私領)과 군현제(郡縣制)」(하일식, 『동방학지』122, 2003)
『역주 한국고대금석문(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한국고대사회연구소(韓國古代社會硏究所)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신라 관문성(新羅 關門城)의 명문석 고찰(銘文石考察)」(박방룡, 『미술자료(美術資料)』31,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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