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2책의 필사본으로 권1은 소(疏) 1편, 시(詩) 125수로 구성되었고, 권2에는 서(序) 6편, 기(記) 11편이 실려 있다. 권3은 찬(贊) 3편, 제발(題跋) 15편, 상량문(上樑文) 1편, 잡저(雜著) 2편으로 구성되었으며, 권4는 제문(祭文) 14편, 애사(哀辭) 4편, 행장(行狀) 2편, 묘표(墓表) 2편, 묘지(墓誌) 1편으로 이루어졌다. 부록은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 유묵(遺墨) 등으로 구성되었다.
「간암이선생문인신변소(艮菴李先生門人申卞疏)」는 1725년(영조 1) 그의 스승 이희조(李喜朝)의 신원(伸寃)을 위해 문인을 대표하여 지은 것이다.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이희조가 소론(少論)의 무고를 입고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철산으로 이배되는 도중 정산에서 사망한 일과 당시 노․소론간의 시비에 얽힌 문제가 소상히 적혀 있다. 조선당쟁사 연구에 참고가 되는 자료이다.
시(詩)는 주로 단양 8경, 선산의 광풍루(光風樓), 괴산의 화양동 등 자연을 배경으로 읊은 것이 많다. 화첩(畵帖)에 대한 화제가 상당수 들어 있어 주목을 끈다. 그의 시가 “성당(盛唐)의 시풍을 받아 절작(絶作)이 많고, 고아핍진(古雅逼眞)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듯이 화실(華實)이 서로 부합되고 기상과 격조가 높다.
서(序) 중 「송삼척부사이병연서(送三陟府使李秉淵序)」는 삼척부사로 부임해 가는 이병연(李秉淵)에 대한 글이며 회화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병연의 산수화를 즐기는 고벽(固癖)과 더불어 바다와 산의 절경이 으뜸인 동해안으로 가기 전에 당시 대표적 화가인 정선(鄭敾)에게 「대관령도(大關嶺圖)」를 그려 받아 벽 위에 걸어 놓고 보았다는 내용이 흥미롭다.
발(跋)은 주로 저자 자신과 이병연, 정선 등의 화첩에 대한 발문이 많다. 특히 「구학첩발(丘壑帖跋)」에서는 정선이 미불(米芾)이나 동기창(董其昌)같은 중국의 대표적 남종화가(南宗畵家)들의 화풍을 배웠고, 많은 여행과 노력을 통해 우리나라의 산수화를 새롭게 발전시켰으며, 구도[布置]나 필법(筆法)에서 남다른 특징을 지녔다고 평가하고 있다.
잡저(雜著) 중 「책제(策題)」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화론(畵論)을 피력한 글이다. 그는 중국 고대의 여러 정교적(政敎的)인 사례들이 회화의 보조 없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를 지적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문물이 찬란하게 빛나고 신라·고려 이래로 문예의 창성이 중국에 비견할 만하며, 문장과 명필의 이름은 후세에 전해왔지만, 어찌해서 유독 그림에 있어서만 그 전함이 없었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선조에 이르러 도화서(圖畵署)를 설치하고 회화를 숭상, 권장한 점을 찬동하면서 중국의 화론을 빌어서 “글이 경위(經緯)를 다하지 못하고 글씨로도 형용을 그려 내지 못한 것을 그림에서 구한다.”라고 하고, 그림을 잡기(雜技)로 소홀히 하는 것의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또 「만록(漫錄)」은 만필(漫筆: 일정한 형식이나 체계 없이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을 수록한 것으로 22칙의 단편을 모아 놓았다. 경사자집(經史子集)에 걸친 학술상의 사소한 문제들을 다룬 것을 비롯해 조야(朝野)의 고사(故事)에 관한 견문과 자신의 문필과 회화에 대한 자술(自述)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애사(哀辭) 중 「겸재정동추애사(謙齋鄭同樞哀辭)」에서는 정선의 성실한 도덕관념, 화가로서의 착실한 수련과정, 화풍의 연원과 특징, 당시 사람들의 높은 평가, 저자 조영석과의 돈독한 우정 등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는 18세기를 무대로 한국의 시·서·화의 발전에 주도적인 구실을 하였던 저자 조영석은 물론 정선·이병연 등에 관한 새롭고 구체적인 기록들이 많다. 그래서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고 재조명하는 데 큰 도움을 주며, 특히 한국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저자 자신이 편집, 정서한 필사본 2책을 1984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도판과 부록을 붙여 영인, 간행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