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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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왕족을 제외한 궁중 모든 여인들의 총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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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왕족을 제외한 궁중 모든 여인들의 총칭.
내용

나인[內人]들과 그 아래 하역(下役)을 맡은, 무수리[水賜] · 각심이(방아이) · 방자(房子) · 의녀(醫女) · 손님이라 불리는 여인들이 범주에 든다.

그러나 보통 궁녀라 하면 상궁(尙宮)과 나인으로 분류되는 거대한 인구의 여인들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의 궁녀로 포괄되는 내역은 다음과 같다.

① 무수리 : 몽고말이며, 궁중 각 처소에서 막일을 담당하는 여인을 말한다. 민족 항일기에는 궁 밖에서 매일 통근하는 제도였다고 하나, 원래는 궁중에 붙박이로 소속되어 있었다.

② 각심이[婢子, 또는 房子] : 비번 날 사는 개인 집인 상궁의 처소에서 부리는 가정부 · 식모 · 침모 등의 총칭이다.

이들의 월급을 국가에서 지급했으므로 방자라고도 한다. 방자란 관청의 사환으로, 예컨대 <춘향전>에서의 방자와 같다.

③ 손님 : 왕의 후궁으로서 당호(堂號)가 바쳐지고 독립 세대를 영위하는 여인의 집에서 살림을 맡아하던 일종의 가정부 같은 여인이다. 대개 친정붙이이며, 보수는 후궁의 생계비에서 지출된다. 따라서, 손님이라는 이름은 궁 밖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로, 무수리나 각심이와는 달리 예의를 갖춘 말이다.

④ 의녀 : 약방 기생이라고도 한다. 약방이란 궁중 내의원(內醫院)의 별칭이며, 의녀의 소속이 내의원이지만 전신(前身)이 기생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임은 평상시에 궁녀들에게 침을 놓아주기도 하고 비 · 빈들의 해산에 조산원(助産員) 노릇도 하지만,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기생으로 변신한다. 원삼(圓衫)을 입고,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손에는 색동 한삼(汗衫)을 끼고 춤을 추는 무희이기도 하다.

원래 의녀 제도는 궁중에서 비빈을 비롯해 궁녀들이 내외법으로 말미암아 남자 의원의 진맥을 회피해 죽는 자가 많았으므로, 태종 때 창고궁사(倉庫宮司)의 어린 비자(婢子) 중에서 수십 명을 뽑아 진맥과 침 놓는 법을 가르친 것이 그 시초이다.

그러나 원래 배우지 못한 천민이라 무식해서 별로 성과가 없었으므로, 연산군대에 와서는 서울 각 관청에서 잔치가 있을 때 아예 화장을 시켜 기생으로 참가시켰는데, 이러한 제도는 조선시대 말기까지 내려왔다.

고종대만 해도 의녀의 수가 80명이나 되었으나, 서양의사(西洋醫師)가 궁중에 들어오고나서부터 의녀 제도는 없어졌다.

⑤ 나인 : 궁녀들은 반드시 자신들을 상궁나인이라 하여 상궁과 나인을 구분하였다. 나인과 상궁은 그들 사회에서는 차원이 다를 만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인 아래에는 견습나인이 있는데, 이들은 아기나인 또는 생각시로 불린다. 보통 4세부터 계례(筓禮) 전인 17세 사이의 어린이 및 소녀 나인들이다.

그리고 궁녀의 신분적 등급은 견습나인 · 나인 · 상궁의 세 종류로 나뉘며, 그 세 종류 가운데에서도 입궁 연조와 소속 부서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같은 상궁이라도 경력에 따라 정7품도 있고 정5품도 있으며, 또 같은 정5품의 상궁도 소속 부서의 격에 따라 같을 수 없었다.

실제로 궁녀는 왕족의 사생활을 위한 일종의 사치 노예이므로,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은 의식주로 분장(分掌)된 각 독립처소이다.

지밀(至密) · 침방(針房) · 수방(繡房) · 내소주방(內燒廚房) · 외소주방 · 생과방(生果房) · 세답방(洗踏房)의 일곱 부서 외에 세수간 · 퇴선간(退膳間) · 복이처(僕伊處) · 등촉방(燈燭房)의 네 부설 부소가 있다.

위 부서에 소속된 궁녀들을 일반 개인 가정으로 비교해보면, 지밀나인은 몸종격으로 가장 격이 높고, 침방 · 수방 나인들은 침모(針母), 소주방과 생과방은 찬간(饌間)의 식모들인데, 궁중에는 무수리가 하역(下役)을 맡았다.

세답방은 표모(漂母)로서 빨래 일을 맡는데, 일반 개인 가정에서는 빨래를 보통 노비가 하고, 다리미와 다듬이질은 대개 경험이 많은 부인들이 맡는다.

따라서 궁녀의 격은 지밀이 가장 높고, 다음이 침방과 수방으로, 이들은 양반 부녀와 같이 치마도 외로 여며 입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길게 늘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그것은 마루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성격상 소주방이나 세답방 나인같이 치마를 걷어올릴 필요가 없기도 한 때문이다.

위 세 부서 외의 다른 부서는 치마를 바로 입고 앞치마를 위에 둘러 걷어올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시가 있는 곳도 지밀과 침방 · 수방뿐이다. 나머지 부서들은 생[絲楊]을 맬 수 없으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다.

궁녀의 수는 조선시대의 경우에 약 500~600명 정도였다. 궁녀는 왕이 있는 법궁(法宮, 또는 本宮)뿐만이 아니라 제사궁(祭祀宮, 혹은 魂宮)과 별궁에 소속된 여인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본궁의 궁녀들은 별궁나인을 ‘궁것’이라고 경멸했다. 본궁의 경우, 왕을 비롯해 모두 독립 세대로 영위되며 왕과 왕비와 왕대비 등은 같은 규모의 궁녀 인구를 갖는다.

궁녀가 90명이라 할 때 왕 · 왕비 · 대비전의 처소별 궁녀수는 대개 지밀 20∼27명, 그밖에는 15∼20명 정도로 추측된다.

이러한 궁녀 사회에도 간부들이 있었는데, 총수격인 우두머리 상궁과 그 밖의 맡은 바 직책의 중요성에 따라 특별 대우를 받는 궁녀들이 있었다.

즉, 제조상궁(提調尙宮)으로 큰방상궁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많은 궁녀들 중에 어른으로 왕명을 받들고 내전(內殿)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또한, 아리꼬[阿里庫]상궁으로 불리는 부제조상궁은 내전의 창고(倉庫, 아랫고 · 下庫)의 물품을 관리했다.

그리고 일명 지밀상궁으로도 불리는 대령상궁(待令尙宮)은 왕의 측근에서 항상 그림자와 같이 시위(侍衛)했다. 왕자녀의 양육을 담당했던 보모상궁(保姆尙宮)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왕세자의 보모가 가장 격이 높았다.

또한, 지밀상궁 중에서 궁중 의식이나 잔치 때 왕을 비롯한 왕비 · 왕대비 등의 인도와 진행을 담당했던 시녀상궁(侍女尙宮)은 지밀의 서책 관리와 국상(國喪) 때 곡읍(哭泣)을 담당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감찰상궁(監察尙宮)은 궁녀들의 상벌을 담당했으며, 감시병 구실도 겸한 두려운 존재였다.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退出)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였다.

왕의 직계 및 그 배우자 외에는 후궁도 궁중에서 죽을 수 없으므로, 늙고 병들면 궁녀는 궁궐을 나가야 했다.

궁녀의 선출은 원칙적으로 10년에 한번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지밀나인의 경우 조건이 까다로와서 상궁들이 두세번씩 선을 보러 나갔다. 그러나 대개 연줄과 세습이라 할 수 있으며, 고모가 조카를 들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궁녀의 출신 계급은 지밀과 침방 · 수방은 중인 계급, 기타는 대개 상민 계급이었다. 입궁 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려 4∼8세, 침방 · 수방이 6∼13세, 그 밖은 12∼13세가 관례였다.

궁녀는 입궁 후 15년이 되면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다.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 머리에는 개구리첩지를 단 제복이 일생 동안 그들의 복장이었다.

나인이 된 뒤 다시 15년이 경과되면 상궁으로 승격했으므로, 가장 빠른 4∼5세 입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 35세 이후라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의 상궁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상궁의 신분에 머물러 있지만, 그 대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시위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했다.

이들이 왕의 자녀를 낳게 되면 종2품 숙의(淑儀) 이상으로 봉해져서 독립 세대를 영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궁녀의 보수는 고정적으로 아기나인이 한달에 백미 너말(4斗 : 오늘날의 3두꼴)이고, 옷감이 1년에 명주와 무명 각 1필, 여름에는 베 · 모시도 하사품으로 내려 충분히 쓰고 남을 정도였다. 식생활은 궁중에서 해결되었으므로, 이러한 보수는 친가 부모 · 형제들에게 보탬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서는 월급제가 실시되었는데, 상궁들은 고등관 대우를 받았고, 제조 상궁쯤이면 장관급의 대우를 받았다.

궁녀는 원칙적으로 종신제였지만, 특별한 경우, 즉 이들이 중병이 들었을 때, 가뭄으로 궁녀 방출이 결행될 경우(단, 젊은 궁녀), 모시고 있던 상전이 승하했을 경우 중도에 나갈 수도 있었다.

특히, 가뭄으로 인한 궁녀 방출은 가난으로 국가에서 결혼 못한 노총각에게 결혼 비용을 지급하는 의미와 같은 이치이다. 젊은 궁녀가 헛되이 왕권의 그늘에서 늙어 가는 부당성을 국가에서 인정한 증거이다. 결국 이러한 궁녀 제도는 절대군주국가 시기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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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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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顯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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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이조 여류문학과 궁중풍속의 연구』(김용숙,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1970)
『비장본 한중록』(김용숙 교주,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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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실 족내혼연구』(정용숙, 새문社, 1988)
『고려시대의 후비』(정용숙, 민음사, 1992)
「계축일기의 사적배경」(김용숙, 『아세아여성연구』 6, 1968)
「조선시대 여성사관련 연구의 현황과 과제」(이순구·한희숙,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상, 1992)
집필자
김용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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